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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7월 18일 오전 5시.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돼 있던 프랑코 장군은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좌파 연합 성격의 스페인 인민 전선 정부와 국민을 향해 쿠데타를 선언한다.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쳤던 스페인 내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페인령 모로코 주둔 부대들을 필두로 본토의 세빌리아 바르셀로나 안다루시아 등 전국적으로 반란군이 궐기했다. 정규군 중심의 반란군은 압도적인 우세로 쉽게 쿠데타를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뜻밖에도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힌다. 전국적인 규모의 민병대가 인민 전선 정부를 지지하며 결성돼 반란군과 대적한 것이다. 대도시에선 반란군이 민병들에게 대패했다. 스페인 민중들의 힘은 전세계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이끌었다. 4만여명의 외국인 용병이 '정의'를 외치며 '국제 여단'이란 이름으로 공화파 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내전은 1939년 4월 1일 공화파 정부의 완패로 끝났다. 사망 30만∼60만명, 망명 25만∼50만명. 내전 중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인 프랑코를 지원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이후 두 번째의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을 우려한 미국과 유럽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은 파시즘과 대결중인 스페인 인민 전선 정부와 민병대에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







볕을 직접 받으며 앉아 있기엔 그 열기가 아직은 조금 부담스런 계절이었다. 옆으로 긴 계단의 맨 윗단 끝자락에 걸친 나뭇가지의 그늘은 두 사람쯤이 걸터 앉을 만한 너비였다. 대학 4학년생들의 대개의 습관처럼 당시의 내 행동반경도 도서관 주위를 맴돌았다. 공부를 하든 안하든 그랬다.
몸이 울렁대듯 떨리고 있었다. 삽상하지만, 그늘에서 반팔로 맞기엔 약간 으슬한 뒷맛을 남기는, 가을로 들어서는 때의 바람 탓은 아니었다. 애써 다독였지만 몸이 아직 울음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눈두덩의 붓기도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하긴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가던 크라운관에서 미처 눈물을 여미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불과 10여분 전이었다. 겸연쩍어 하며 여자친구를 수업에 들여보내고 도서관 앞 계단으로 와서 앉은게 오분이 채 되지 않았다 싶었다. 충혈된 눈 탓인지 유난히 볕 든 자리는 밝고 듬성 듬성 내린 나무 그늘들은 깊었다. 또 한 차레 바람이 훑어 왔다. 눈 주변의 열기가 가볍게 떠올라 실려갔지만 몸의 떨림은 그치지 않았다. 한가로운 초가을의 대학 교정을 어디 시선을 두지 못하고 멍하니 눈 앞에 버려두고 있었다. 화나고 아리고 슬펐다. 맹렬하게 그 것이 살들을 울리고 있었다.
“뭐해요?”
소심해서 되려 천연덕스런 행동이 몸에 밴 교내 방송국 한해 밑의 후배였다. 그는 여전한 어색한 털털함으로 어느새 옆에 와 앉았다.
“어 그냥. 영화 보고 왔어”
“커피 뽑아 올께요.”
그는 또 언제인지 모르게 일어나 도서관 입구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새 태양이 조금 기울었는지 그늘 틈새로 햇살이 눈을 쪼아들어왔다. 해가 높은 날엔 반쯤 눈을 감고 다닐 만큼 눈이 햇살에 약한 편이라 나는 금방 새우 눈을 뜨고 얼굴을 찌푸렸다. 자리를 그림자 쪽으로 조금 당겨 앉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후배는 다시 아까처럼 어느새 종이컵 두개를 들고 안쪽 그늘을 차고 앉았다.
“뭐 봤어요? 랜드 앤 프리덤? 난 내일 볼려고 했는데.”
그가 건넨 종이컵을 매만지며 갓 뽑은 자판기 커피의 온기를 훔치려고 했지만 여전히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아 울었어. 그 애도 옆에 있는데. 아 왠지 참을 수가 없더라.”
나는 붉힌 눈을 들킬새라 쑥스런 웃음을 날리며 미리 너스레를 떨었다. 금방 진지한 표정을 잘 짓곤 하는 그는 역시 금방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형은 역시 그렇구나.”
조금은 운동권의 성향이 있는 방송국 보도부의 기자 출신인 녀석은 좌파가 어떻구 하며 몇마디를 주워넘겼다. 몸의 신경이 조절되지 않는 상태에서 나도 멍하니 몇마디를 거들었지만 말들은 그냥 흘러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형은 역시 그렇구나.’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맴돌고 있었다. 대체로 감상적인 편인 나의 성향을 말하는 것인지, 어쩌다 가끔 내비쳤던 흔히 말하는 좌파적 생각에 대한 나의 동의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지. 해는 계속 조금씩 기울며 우리가 앉은 자리의 그늘을 잡아먹고 있었다. 바람이 다시 볕과 그늘과 우리를 공히 훑으며 지나갔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이후부터야 조금씩 사회의 변화와 노동운동들에 대한 생각들을 여며가고 있었지만 난 여전히 좌파도 아니었고 운동권도 아니었었다. 그냥 그랬다. 생각만이 조금씩 기울고 있을 뿐이었다. 성적관계로 정규 학년에서 한학기를 더 다녀야 했지만 난 그저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 4학년이었다. 그런데로 취업이 무난한 레벨의 학교 학과였고 난 하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무미한 대학 교정에 있었고 학내 어딘가에서 주최한 영화제에서 ‘랜드 앤 프리덤’이란 영화를 여자친구와 소일삼아 봤었다. 그랬다.
역시나 언제인지 모르게 후배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후로도 나는 한참을 오후가 깊어가는 계단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몸의 떨림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멈추지 않고 있었다.



** 역사란 향수가 아니다. 역사는 왜 우리가 지금의 모습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우리가 현재의 상황에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가 향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부르주아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우리가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며 따라서 역사를 탐구하여 민중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되돌려 주는 것은 감독으로서 갖는 책임 중 하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민중의 과거에 대한 생각을 조절할 수 있다면 당신을 그들의 현재를 재조정할 수 있고 현재를 조정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민중의 생각을 조정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 켄 로치 **







1936년 영국 리버풀의 광산산업 실업자였던 젊은 데이빗 카는 어떻게 해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되었는가?
전쟁이란 극히 일부의 파쇼적인 권력자와 전쟁을 통한 자본적 이익을 획책하는 독점자들을 제외한 모든 개인에게 있어선 선택이 아니라 강요일 것이다. 물론 전쟁에 대해 감상적 환상을 품은 이들이나 미친 살인광들에겐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전쟁이란 우리가 91년에 TV를 통해 감상했던 것처럼 내 집 앞마당의 일이 아닐 때나 흥미로운 일일 뿐인 것이다. 그것도 멀면 멀수록 화려하면 화려할 수록 더 재미가 나겠지. 수만 수십만의 목숨이 끊어져 나가는 참상에 자신의 경우가 아니므로 재미를 느낀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데이빗 카는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극히 소수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전쟁을 놀이쯤으로 착각하는 얼뜨기였나? 그도 아니면 다만 미친 살인광이었나? 대답부터 말하자면 그는 위의 것중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위의 전제들과는 반대위치에 서있다고 봐야 더 적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왜 자신의 나라도 아닌 먼 남의 나라에 가서 목숨 걸고 싸우게 되는 것일까?
여기서 데이빗 카란 인물을 들여다보자. 그는 20대 초중반의 영국인 노동자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직장의 폐업으로 인한 실업자다. 거기에 더해 그는 영국 공산당의 당원이며 자신이 가진 이념에 열정적이며 그 이념에 희망을 품고 있다. 여기서 그의 스페인 내전 참전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마리를 살필 땐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연대, 흔히 말하는 인터네셔널은 자칫 겉만 훑고 지나가면 또하나의 감상적 환상을 도출해내기 쉽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익히 겪어온 주위의 시선들을 돌이켜보자. 주위란 존재들은 그들을 이념에 현혹된 단순하고 순진한 혹은 음험한 또라이쯤으로 여기곤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저러다 큰 코 다치고 정신차리겠지, 뭔가 한몫할 꿍꿍이 속이 있을거야, 라고......
그들 말데로 데이빗 카는 순진한 환상을 꿈꾸는 단세포일까? 그러다 냉혹한 현실에 부딛히면 그 때서야 환상을 깨칠 미숙한 자일가? 또는 혁명입네 진보네 하며 언젠가 권력의 한 귀퉁이를 붙잡고 단단히 한보따리 챙기려는 뱃속이 시커먼 놈일까? 그런 이유들이 데이빗 카를 목숨을 건 전장에 나서게 했을까?
이러한 미혹들에 대한 해답을 이 영화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다. 스페인 내전에 실패하고 떠돌던 데이빗 카는 그 투쟁들을 돌이켜보며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한다.
"혁명은 전염병과 같다. 이 곳에서 우리가 성공했다면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이 말을 앞의 켄 로치의 말에 비추어보자. 소수의 권력자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역사 변화의 원동자를 그는 ‘우리’란 말에 두고 있다. 우리란 바로 그 자신 또한 속해있는 노동자, 민중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는 또 ‘세계’라고 말한다. 그 세계란 스패인 내전에 참전하기 전에 그가 속해있던 영국이란 땅도 포함되어 있고 그의 동지들이었던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인들 모두의 땅도 포함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혁명이 성공했으면 그 혁명은 데이빗의 영국, 그리고 그의 동지들의 땅에도 계속해서 전파되어 갔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그랬다면 무엇이 변했을까? 아니 그들은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었을까?
데이빗 카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할 것을 결심하며 그의 연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영리적인 이유로 그가 다니던 공장은 폐업했고 그는 실업자가 되었다. 아니 당시 영국에는 영리와 효율을 이유로 수백만의 구조적 실업자가 양산되던 시기였다.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한창 고도화의 절정을 이루던 그 시기에 오히려 영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오히려 실업이 증가하고,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현저히 낮아지는 현상이 공히 나타나고 있었다. 구조적 폐업과 실업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폐업한 자본가들은 도리어 재산이 증식되고 있었다. 몇몇의 나라, 몇몇의 개인에게로 부의 편중이 심화되고 있었다. 국가간의 이러한 심각한 부의 편중은 결국 이후에 2차세계 대전 발발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2차세계대전으로 국가간의 부의 편중은 일정 정도 해소되거나(전승국의 경우) 또는 억눌러 진다.(패전국의 경우) 하지만 개인간의 부의 편차 현상은 여전히 지속되어 오늘에 까지 이르고 있다. ]
데이빗 카와 그의 동지들은 그러한 불평등함을 바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허황함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실에 치밀하게 접해있는 인식이었다. 모두에게 일할 기회를, 일한 만큼의 댓가를,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평등함을! 이 것을 과연 감상적 치기나 순진한 이념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소수의 독점자들에 의해 장악되어온 역사속에서는 그 것은 불온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데이빗 카와 같은 노동자에겐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스페인 내전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것이다. 그 혁명이 자신의 땅에 전파되어 그의 생존을 지켜주길 원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전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고 그래서 4만여명의 외국 노동자들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것이다. 혁명과 평등은 쉬이 전염되고 그만큼이나 자본의 독과점 또한 쉽게 전염된다. 독과점 자본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연합하기에 노동자 또한 언제나 어디에서나 반드시 연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60여년전의 성공하지 못한 혁명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 영화를 애띤 향수를 머금고 바라보는 걸 거부하며, 당신에게 깃들지도 모르는 그 낭만성을 경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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