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20]국가권력과 지식ㆍ정보
- 작성일
- 09-11-25 10:55
1.
지식ㆍ정보화 사회는 구술과 책을 대신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지식과 정보를 생성하고 공유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식ㆍ정보의 상호 소통과 공유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의 정신을 잇는 것으로 지식과 정보의 평등을 추구한다. 이와 달리 오래 전부터 국가권력과 지배집단은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려는 욕망을 현실화시켜 통치에 활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지식과 정보의 독점과 통제를 해체하여 다중을 향해 열어 놓는 방식은 시대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부터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문헌을 간행하고 지식과 정보를 유통시켰다. 하지만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금속활자의 역할과 사회적 기능은 구텐베르크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동아시아의 경우 국가나 관이 출판을 장악하거나 그것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국가와 지배계층의 사유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반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국가와 종교권력에 구속당하지 않고, 다중을 향해 열어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국가의 지배를 뛰어 넘어 다중을 향해 지식과 정보를 열어 놓고 점차 확대시켜 나간 방식은 결국 근대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양(洋)의 동서(東西)를 규정한 결절점 중의 하나였다.
2.
우리는 어떠했던가? 조선조만 하더라도 국가권력은 지식과 정보를 담은 서적을 장악하면서 통치에 적극 활용하였다.『경국대전』을 통해 지배질서의 법률적 논리를 전파하고, 주자의 『가례』를 통해 가부장제와 사대부 중심의 지배질서를 강요하며,『삼강행실도』를 통해 국가 권력의 지배와 복종의 논리를 합리화하여 열녀를 탄생시켰다. 사실 조선조와 같이 국가가 출판과 인쇄술을 장악하거나 통제하더라도 서적의 유통과 지식ㆍ정보의 확산을 국가권력이 원하는 만큼 완전하게 차단할 수 없었다. 견문지식을 필사하거나, 베껴보기와 같은 형태로 지식을 습득하고 유통시켜, 합법과 비합법의 공간에서 지식과 서적의 생성 유통시스템을 작동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국가 권력이 지식·정보의 독점과 검열에 저항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더욱이 조공체제에서의 조선조는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와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을 유지하였다. 그러한 소통방식의 핵심은 바로 서적의 수입이었다. 한문문화권의 동문세계(同文世界)에 참여한 순간부터 지배집단과 문인지식인들은 세계질서의 중심에 있던 중국의 서적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통해 신지식을 생성하거나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기득권을 넓혀나가는데 활용하였다. 조선조 국왕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장악하고, 신지식의 습득을 위해 서적수입과 지식ㆍ정보의 흐름을 장악하고 이를 통치와 왕권강화의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조를 들 수 있다. 흔히 정조를 호학군주(好學君主), 군사(君師)와 문화군주(文化君主)로 부른다. 그의 폭넓은 독서와 박학, 그리고 신지식의 습득에 누구보다 앞장섰기 때문이다. 당시 정조는 우리나라 최고의 장서가였다. 그는 국왕의 위치를 활용하여 해외의 최신 서적을 시차 없이 수입하였다. 한 대목을 보자.
대개 풍석(楓石)의 부친인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정조 원년(1776)에 정사(正使)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청나라 고종이 바야흐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사고전서』를 찬수(纂修)하게 하였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었다. 정조가 서호수에게 『사고전서』편찬의 일이 만약 끝났거든 한 질을 사오도록 하라고 하였다. 서호수가 명을 받고 가서 사려고 하니 과연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별비은(別備銀) 몇 천 냥을 써서 『도서집성』 한 부를 사왔는데, 이는 유서(類書)로서 목록을 합해 5,020권이었다. 상이 열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 당장에 우리나라 종이로 장정을 고치라 명하고, 또 내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 등으로 하여금 우선 작은 제목을 쓰게 하고, 또 글씨를 잘 쓰는 지사(知事) 조윤형(曺允亨)에게 명하여 그 바깥 제목을 쓰도록 하여 주합루(宙合樓)에 간직하였는데, 각신(閣臣)이 아니면 감히 대출을 요청할 수 없었고, 매우 보배롭게 애지중지하여 각신 이외의 신하들과 서생(書生)들은 구경해본 자가 없었다. 내가 듣건대 병신년(1776)에 사올 때 연경의 서점 사람들이 비웃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책이 간행된 지는 거의 50년이 지났는데, 귀국(貴國)은 문(文)을 숭상한다고 일컬어지면서 이제야 겨우 사 가는지요? 일본은 나가사키[長崎]에서 1부, 에도[江戶]에서 2부 등 이미 3부를 구해 갔습니다.”라 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부끄러워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지난 정해년(1827) 여름, 익종(翼宗)이 대리(代理)할 때 나의 재종형 해거공(海居公) 홍현주(洪顯周)가 왕의 사위로서 일찍이 사사롭게 모시고 있었는데, 공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이미 각신이 아니니 『도서집성』을 일생 보지 못합니다. 한번 빌려 주시기를 빕니다.” 하니, 익종이 웃으며 허락하고 액예(掖隸)에게 명하여 공의 집에 보내주었다. 공이 나를 불러 같이 열람했기 때문에 나 역시 한 두 번 가서 그 대강을 보았다.
― 홍한주,『지수염필』
정조가 연행사신에 참여한 신료에게 따로 경비를 마련하여 아직 간행하지도 않은 저 호한한『사고전서』를 구입해 오도록 한 것이나, 개인이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질의 『도서집성』을 수입하여, 규장각에 두고 이를 열람한 것은 단순히 그의 독서벽과 장서가의 면모로만 읽을 수 없다. 정조는 탁월한 정치가였고,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던 제왕이었다. 그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통해 연경의 학예계(學藝界)는 물론, 서구의 동향과 세계사의 흐름을 감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왕권강화와 국가통치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최신 서적을 수입하고 열독하였다. 정조가 경연을 활용하여 직접 신하들에게 시험을 내어 고과를 매기는 등의 일련의 호학적 면모는 호학군주나 군사가 아닌 탁월한 정치력을 보인 제왕적 면모이다. 사실 정조는 지식과 정보를 장악하고 통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근에 알려진 ‘정조어찰첩’에서 보듯이 그는 당시 가장 많은 신지식과 고급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이 습득한 지식과 정보를 적절히 통치에 활용하였던 탁월한 통치자였다. 위에서 검서관 이외에 『도서집성』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도 자신이 지식·정보를 독점하기 위한 의도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대에 밖으로부터 많은 양의 서적이 수입되고 지식·정보도 유통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정조는 “학문이 정도(正道)에 무익하면 학문이 없는 것만 못하고 문장이 ‘실용’과 관계없는 것이라면 문장이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여 비실용적 서적을 문제 삼았다. 특히 패관이어(稗官俚語)의 서적은 실용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방탕하게 만든다고 비난하는 한편 이러한 서적의 수입과 유통을 금지해야한다고 제기하였다. 이처럼 정조가 국왕의 지위와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서적의 수입을 금지하는 것은 문화 정책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거니와, 이는 검열 정책의 하나로 지식과 정보를 통제하는 폭력성을 담는다. 정조가 취한 문체반정(文體反正)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체반정의 시행은 결과적으로 문인지식인들의 자기검열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문체를 통해 새로운 사유나 의식을 드러내려는 공간을 차단함으로서, 지식인의 사유를 국가의 정책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는 억압성을 보여 주었다.
3.
이처럼 국가권력을 통한 검열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조 문인지식인들은 연행과 통신 사행을 통하여 외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서적을 수입하고 보급하여 이를 통해 신지식을 생성하고 확산시켜 나갔다. 특히 서적 수입의 루트는 중국과 일본이었다. 유득공은『고운당필기』에서 “나가사키에 상선을 타고 드나드는 왜인들이 저 강남(江南)의 서적을 들여오는 것에 기인한다. 우리나라의 책이 왜국에 전해진 것 또한 많다.”라 하였다. 신유한 또한『해유록』에서 “대판에 서적의 많음은 실로 천하의 장관(壯觀)”이라 하여 에도시기 출판문화의 활황을 언급하였다. 연경의 유리창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은 아는 바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에서의 서적 수입도 상당하였다. 더욱이 해마다 연행사신들의 서적 수입과 유통은 국가권력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사행(使行)에 참여한 문인지식인들을 비롯한 중간계층의 인사들은 합법과 비합법의 공간을 이용하여 서적의 수입과 유통에 직간접으로 간여하였다. 이들은 지적 관심과 욕망을 밖으로부터의 서적 수입을 통하여 끊임없이 해소하였다. 이러한 서적의 수입과 지식ㆍ정보의 확대는 국가권력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이며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시대를 바꾸는 큰 물줄기는 이 같은 세류(細流)에서 시작하고 결국은 도도한 대하(大河)가 되는 것은 그간 우리가 보았던 역사적 진실이다. 국가 권력이 지식과 정보를 장악하고 통제하거나, 검열을 통해 국가권력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은 전근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것은 전근대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발상이자,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쓴이 / 진재교
*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BK21 동아시아 융합사업단/WCU 단장
* 주요 저/역서
충돌과 착종의 동아시아를 넘어서, 성균관대 출판부, 2007
문예공론장의 형성과 동아시아, 성균관대 출판부, 2008
정조어찰첩, 성균관대 출판부,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