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역정: 나의 청년시대』(창비 1988)는 고 리영희 선생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담담하게 기록한 자서전이다. 지난해 12월 고인의 1주기를 맞아 광주 망월묘역에 참배하러 가는 내 가방에는 그 책이 들어 있었다. 1988년에 초판 1쇄가 발행되었으니 벌써 20여년이나 된 오래된 책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책장을 넘겨보다가 웃기는 에피소드 한 대목을 발견했다.

 

이 승만 시절, 청년 리영희가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때였다. 미국 출장을 위해 여권 신청서류를 제출한 리영희는 며칠 후 동대문경찰서의 부름을 받고 출두한다. 신원조사 관계자는 서류에서 두개의 빈칸을 가리키며 왜 그 칸은 기입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리영희가 쓸 내용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자 담당관은 그러지 말고 당장 써넣으라고 독촉한다. 리영희는 고심을 하다가 "그렇다면 좋다"며 김구와 홍난파를 적어넣었다. 그것을 본 담당관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거 왜 이러시우. 잘 아시면서..."

담당관은 홍난파는 괜찮지만 김구는 다른 이름으로 적으라고 권하다가 리영희가 기어이 말을 듣지 않자 협박조로 나온다.

"아 지금이 어떤 시국인 줄 누구보다도 잘 아실 기자분이 왜 고집을 부리시오? 정말 그러다가 여권이 나오지 않습니다."

리영희는 끝내 고치기를 거부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담당관이 기자라는 리영희의 직업에 일말의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담당관은 선심을 쓰듯이 말한다.

"뻔히 알면서 그러는군. 할 수 없지요. 내가 적절히 써서 처리해드리죠."

얼마 후 여권은 무사히 나오고 리영희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리영희는 그 담당관이 김구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누구의 이름을 써넣었는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그 때 여권 신청서류에 적어넣게끔 되어 있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신원 보증인? 그럴 리는 없겠다.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은 '존경하는 사람'란이었다. 국가에 제출하는 공식 서류에... 거기다가 두개의 공란이 있었다니까 존경하는 인물을 둘이나 적어넣어야 했던 것이다. 느낌상 한 칸은 당연히 이승만을 써야 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한 칸의 목적은? '설마한들 이기붕이기야 하겠는가?' 리영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가 막혀 한다. 

 

요즘 같으면 존경하는 인물을 적어내라는 건 초등학교에서나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하긴 당시에 이승만은 국부(國父)였고 국민들은 코흘리개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친절한 선생님 같은 담당관이 틀린 답안을 찾아내 상담을 해주고 알아서 고쳐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어처구니없고 어쩌면 신기하기까지 할 따름이지만, 어쩐지 옛날 일 같지만은 않다. 앞으로 다시 20여년이 흘러 그 누군가 우리의 이명박시대를 회고한다면, 모르긴 해도 수십배의 에피소드가 후대의 독서인들을 웃길 것이 틀림없다.

 

물론 리영희의 자전 은 이런 웃긴 얘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리영희란 인물이 왜 지식인으로서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사랑을 받을 만한지 여실히 드러내주는 책이다.

 

-창비 인문사회출판부 염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