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노약자석.. 그리고 임산부
- 작성일
- 12-03-02 11:20
휴일이었던 어제...
15개월 갓 지난 막내놈과 와이프님하는 집에서 쉬라고 해주시고...
저는 첫째와(6살) 둘째(4살) 두 딸을 데리고 과천국립과학관에서 공연한 '뿡뿡이버블쇼'를 보고 왔습죠.
저희집에서 차를 몰고 과천을 가려면 남태령을 필수로 넘어야 하는데...
빨간날 남태령은... ㅎㄷㄷㄷㄷㄷㄷㄷ
게다가 국립과학관이 있는 대공원에 주차하려면... ㅎㄷㄷㄷㄷㄷㄷㄷ
과감하게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대공원역으로 향했습니다.
여튼.. 가면서 보니... '정말 차 놓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수백만번쯤 들었...
가는 여정은 편하게 잘 갔고.. 공연 구경 잘하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는데...
여기서부터가 본론...
놀러 갔다 오시는 분들이 많은지... 오후 4시쯤 대공원역에서 당고개방향으로 향하는 4호철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타고 있더군요. 당연히 빈 자리는 없었고... 서 있는 사람도 무지 많은 상황...
뭐.. 사람 꽤 있는 지하철에서도 노약자석은 비어 있는 경우도 있어서 일단 노약자석 출입구에서 탑승을 했드랬죠.
그래도 사람이 많았기에... 제가 탄 쪽도 노약자석은 6자리 모두 비어있지 않았죠.
하지만.. 제가 탑승한 출입문쪽 노약자석은 젊은 여성 2명을 사이에 두고, 가운데 할아버지 1분이 앉아계시더군요.
그중 한 여성분 앞에는 남자친구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 서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돌아오는 길이라 애들이 힘들어해서.. 노약자석이기에 양보를 바랬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더군요.
그래서 걍 할 수 없다 생각하고 그 자리에 서서 가는데...
큰 애가 칭얼거리기 시작합니다. 자리에 앉고 싶다고...
'주위를 둘러봐라. 빈 자리가 없으니 안된다. 정 힘들면 벽에 기대고 쪼그려 앉아가라'
둘째 애는 피곤했는지.. 제 손을 잡고 선 채로 졸기 시작합니다.
그 상황을 보다 못한 가운데 앉으신 할아버지께서 양쪽의 젊은 여성들을 향해 한마디를 하셨는데...
발언 수위가 꽤 높은 한마디를 던지셨죠.
'둘 다 병신들인가봐'
그 말을 들은 커플 남자친구쪽에서 욱한 반응을 바로 나타냅니다.
'네? 지금 뭐라구요?'
할아버지는 노약자석 옆에 붙어 있는 노약자이미지를 손으로 가르키시며 말씀을 이어갑니다.
'여기는 노인, 영유아, 임산부, 장애인 등이 앉는 자리인데, 앞에 셋은 아닌 듯 싶으니 병신 아닌가?'
일단 '장애인'을 '병신'이라 표현하시다니... ㅎㄷㄷㄷㄷ
이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이긴한데... 여튼 듣고 있는 양쪽 여성분들도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죠.
당장 커플 남자친구분의 분노게이지가 상승하기 시작합니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음 대사를 칩니다.
'제 와이프 지금 임신중입니다. 임산부가 앉은게 뭐 잘못됐나요?'
아.. 이러다가 요즘 문제가 되는 지하철 동영상이 생겨나는구나~ 싶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그 여성분이 임산부라는 생각을 전혀 안했었는데...
그 남자분 말을 듣고 그 여성분이 배를 보니.. 임산부 맞으시더군요. 배모양으로 봐서 대충 4~5개월쯤?
역시.. 임산부는 만삭때가 다가오지 않으면 겉보기로는 알 수 없는... ^^;
어찌됐든 이게 제 아이들때문에 생긴 일이 아닌가 싶어 제가 끼어들어 중재를 합니다.
'아 할아버지..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보니깐 임산부이신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 남자분께도 말씀을 드립니다.
'임신 초기에는 겉보기에는 모르실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옷도 두껍게 입고 계시니... 할아버지가 모르고 그러신 거니 이해해 주세요'
그 다툼을 듣고 있던 임산부분이 졸고 있는 둘째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 합니다.
그러자 남자분이 말립니다.
'앉아있어. 조심해야지 무리하면 안돼'
다행히 더 이상 큰 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 남자분과의 논쟁은 종료되었지만...
다른 한 쪽의 젊은 여성이 계속 앉아계시니 그 할아버지의 독설은 계속 이어집니다.
솔직히 그 여성분은 많아봐야 20대 초중반으로 보이긴 했는데...
자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할아버지의 독설이 계속되는데도 그 말을 계속 들으며 앉아 있었는데..
제가 '임산부셈?' 물어볼 수도 없고... --a
저희 보다 먼저 내려서 일어서서 내리는 것을 봤는데.. 겉보기에는 알 수 없더군요. --a
걍 멘탈이 강해서(?) 그 독설을 들으며 ㅤㄲㅜㄷㅤㄲㅜㄷ하게 앉아있었던건지... 몸에 불편은 없어보였으니 그 분도 임산부였을 수도 있고...
제가 민망해서 애들 데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을 정도였는데...
지나 다니기도 힘들정도로 사람이 많기도 했고..
그렇다고 저희가 자리를 뜨면 상황이 더 이상해질 것 같기도 했고... 마치 여기서 양보를 안해주니 다른 자리로 가서 '양보해 주셈~' 하는 것 같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또 한가지는.. 일단은 나머지 한 여성 분은 여러가지로 보아 임신중이 아님이 확실해 보이는데... 언제까지 앉아있나 두고보고 싶은 오기도 생기기도 했고...(저도 특히 요즘들어 마음을 곱게 쓰는 넘은 아니라서... ^^;)
여튼 그 할아버지께서 한참 얘기하는중 사당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저희가 미동도 안하고 가만히 서 있자
(저희는 동작역에서 지하철 갈아타야했기에.. ^^;)
'사당에서도 안내려요? 할 수 없군 내 자리에 앉아요.' 라고 자리에서 일어나시더군요.
화들짝 놀라서..
'아니에요. 괜찮으니깐 앉아계세요~ 손사래를 치고...'
서로 그러고 있는 사이 열차는 사당역에 도착해서 지하철 문은 열리고...
보기만해도 거동이 너무 불편해보이시는 머리가 완전 백발이신 할머니 한 분이 타시고...
할아버지가 양보해주신 자리는 당연히 그 할머니에게 드려야 했지요.
저희쪽 자리에서 이런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반대쪽 노약자석에 앉아계신 할머니 3분도 지켜보시며 거들고 계셨는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걸 보시자 그 할머니분들 중 한 분이 또 자리에서 일어나시며 애를 앉히라도 하시더군요.
역시 괜찮다고 사양해보았지만.. 할머니는 이수역에서 내리신다며...
양보해주신 덕에 그 뒤로는 애들은 편히 앉아서 올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도 동작역에서 갈아탄 9호선 지하철도 한가했고...
여튼 지하철에서 이런 작은 소동이 있었고...
집에 돌아와서 이 얘기를 와이프님하에게 해드렸더니...
와이프님하도 임산부시절 경험담을 꺼내시더군요.
애를 낳아서 키우고 있으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임신을 하면 임신초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때는 겉보기로는 전혀 티가 안나지만, 정말정말 조심해야하는 시기죠.
제가 산부인과의사는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
제 주변에 유산하시는 분들은 100% 임신 3개월 이내에 유산을 하신...
여튼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고, 절대 무리를 하면 안되는 시기죠.
하지만 보통 출산휴가는 출산때가 임박해서야 쓰곤 하니...
회사를 다니시는 임산부라면 임신초기때도 출퇴근을 해야하는데...
울 와이프님하도 지하철을 탈 때 노약자석에 앉아올때가 많았다 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노약자석에 앉아서 오면 뭐라고 하시는 분들을 꽤 자주 만났었다고 하더군요.
심지어는 임산부라고 얘기를 해도 못믿고 화내시는 분들도 있었고...
그래서 산부인과에서 주는 임산부수첩을 들고 타서,
혹 노약자석에 앉아가게 되면 임산부수첩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들고 앉아있었다고... ^^;
얘기가 장황하게 길어졌는데...
어제 그 상황속에서 여러가지 생각들이 나더군요.
임산부와 관련된 채선당 사건도 생각나고... 지하철에서 발생한 다툼을 담은 각종 동영상 생각도 나고...
그러면서 반성도 되더라구요.
사실 저도 그 젊은 여성분들 임산부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하고...
울 애들을 위해 양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약자석 앞에 서 있던 것인데...
애 셋이나 낳아 키우면서...
와이프님하가 임신시절 힘들어 고생했던걸 그렇게 지켜봤으면서도...
어찌보면 제 자신도 임산부 배려를 못해준 상황이었으니...
뭐 그렇다고 해도... 할아버지 독설을 그리 듣고도 끝까지 앉아있었던 나머지 한 여성분은 아직도 임산부라는 생각이 안들지만... ^^;
그래도 보통 임산을 하게 되면 배는 안나와도 얼굴을 자세히 보면 좀 부어있곤 하거든요.
근데 그 여성분은 갸름하니 화장도 잘 받고 예뻤... ^^;
와이프님하도...
특히 본인이 임신했었기에 임산부 판별을 잘하는데...
애 셋 데리고 버스를 타도 자리에 앉아 절대 양보안해주는 젊은애들 많다며 울분을 토하시곤 했었는데...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던... --;
뭐 편견은 금물이지만요.
그리고..
어제 일을 겪으며 생각했던 마지막 생각은...
예전에 비해 세상이 점점 살기 삭막해지는 것 같은 느낌...
뭐... 제 자신의 마음도 예전보다 더 삭막해졌다는 것을 제 스스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