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르네상스 시대나 그 이전의 화가들에게 시대적 상황과 사회 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가지고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그들이 그리는 대상은 그리스 로마 신화나 예수의 생애, 성서의 이야기가 주요 소재였다. 절대왕권이 강화되면서 화가들은 궁정에 소속되어 왕이나 귀족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대표적으로 고야(Francisco de Goya) 같은 화가를 들 수 있겠다.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이나 모차르트가 활약했듯이. 이들 화가는 화폭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할 뿐 눈에 보이는 밑바닥 사회상이나 자신의 거친 경험세계를 굳이 그릴 이유가 없었다. 19세기 중반 화가 귀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의 눈에 비친 사회의 모습은 그로 하여금 캔버스를 들고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당시 사회는 급격한 경제사회적 변혁을 경험하고 있던 때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는 프랑스에도 불어 닥쳤다. 가내수공업에서 대규모 생산이 가능한 공장제 생산 공정이 정착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농촌지역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주변이나 또한 공장이 밀접한 도시지역으로 몰려들었다.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 이주한 이들은 공장에서 임금노동자가 되어 저임금의 가혹한 노동조건에 시달렸다. 이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지역은 도시에서도 주변부의 하층 빈민가를 형성했고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었다.

쿠르베, 도미에(Honore Daumier) 그리고 밀레(Jean-Francois Milet) 같은 화가들은 당시 현실의 모습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정직하게 그리려고 했다. 이들의 그림은 예술이란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한다는 당시 기존 화단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고, 훗날 이들의 화풍은 하나의 미술사조로서‘사실주의’라고 불리게 됐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55년 쿠르베가 당시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전시한 개인전에‘레알리슴(realisme)’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그의 기념비적인 리얼리즘 작품인‘돌 깨는 사람들’은 1855년 파리 국제전에 출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고 하니 그 예술적 손실이 실로 안타깝다.)

쿠르베가 화폭에 담은 <돌 깨는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 했던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인부가 모자를 쓰고 한낮의 뙤약볕 아래서 무릎을 꿇고 도끼로 열심히 돌을 깨고 있다. 그는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어 보이며, 무릎을 기운 남루한 바지를 입은 채 힘겹게 일하고 있다. 그를 거들고 있는 젊은 노동자는 찢어진 윗도리를 걸친 채 무거운 짐을 무릎으로 받치고 있다. 이들은 힘에 부치는 노동을 하고 있다.

<돌 깨는 사람들> 1849년·유화·15.9×25.9cm·드레스덴 국립미술관 소장

인간의 노동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서양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된 후 인간은 거친 땅에서 엉겅퀴에 긁히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힘든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됐다. 노동의 기원에 대한 소위‘낙원추방 가설’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간노동에 대한 시각은 지극히 부정적이며, 거친 노동은 일종의 죄에 대한 징벌로서 인간에게 숙명(宿命)지어진 것이다.

노동을 표의문자인 한자로 쓰면 勞動이다. 노동이란 두 글자에 모두 힘 力자가 들어있다. 노동이 그만큼 힘이 든다는 뜻이리라. 일본어로는 이라고 쓰는데, 인간이 하는 힘든 수고라는 뜻이다. 영어나 프랑스어로 일을 뜻하는 노동은 labour, travailler라는 동사를 쓰는데 두 단어 모두 힘이 드는 육체노동을 의미한다. 여자가 힘들게 아이를 낳는 일도 같은 labour를 쓴다.

그런 점에서 경제학에서는 노동을 비효용(disutility)으로 여긴다. 노동자의 시간배분(allocation of time)은 보통 일과 여가로 나누는데, 놀이나 여가는 효용을 증가시키지만 일은 효용을 감소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임금 혹은 급료가 바로 비효용에 대한 보상이다. 이러한 노동소득은 영어로 earnings라고 한다. 이 단어는 그냥 소득을 의미하는 income과는 다른 의미로, 반드시 땀을 흘려 번 노동의 대가라는 뜻이 숨어 있다. 쿠르베나 밀레의 그림에서 묘사된 노동자들의 현실은 이러한 힘든 육체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기가 얼마나 고단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 초반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 정도였다. 이때부터 미국의 원조 하에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됐는데, 이는 주로 노동집약적(labor intensive)인 섬유, 봉제같은 경공업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1970년 어느 날, 청계천 피복상가 앞에서 한 젊은이가 분신을 시도했고 그는 죽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처럼 하루에 15시간씩 일을 했고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작업 중에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점심식사에 국을 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고도 임금은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지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역 앞에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소위 이농과 도시집중화가 가속되었던 시절이었다.

피부색이 유색인 사람으로서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루이스(Arthur Lewis)교수는 저개발 지역, 특히 50년대, 60년대의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노동시장의 특징을 규명했다. 그에 의하면 저개발경제에서의 노동시장의 특징은 노동의 공급이 무한 탄력적(unlimitedly elastic)으로 많다는 점이며, 이 때 임금의 수준은‘최저 생계비’수준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후진국 경제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저개발지역에는 공장이 거의 없다. 대개 농업이 주산업이고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공장들이 들어서고 노동력은 농업부문에서 제조업중심의 공업부문으로 이동한다. 공업화는 도시화를 촉진시키게 된다. 도시주변에는 일자리를 구하려는 노동자들이 몰리면서 슬럼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러한 경제의 노동시장에서는 기업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도 놀랍게도(?) 임금은 최저생계비 수준에서 높아지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노동공급이 무한 탄력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란 이런 상태의 노동시장을 단 하나의‘수평적인’공급곡선으로 표현하는 냉정한 사람이다. 그 수평적 공급곡선의 배후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는 노동자의 삶과 임금의 문제를 윤리적인 구호나 고용주의 동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적 메커니즘을 들여다본다. 냉혹한 노동시장의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그의 과제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단순한 곡선 뒤에 숨겨져 있는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과 고통을 마음속에 품어야 하는 것 또한 경제학자의 의무일 것이다.

최병서 동덕여대 경제학과 교수 | cbse@dongd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