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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 크라이스트>를 아직 보지 않은 시점에서 제 마음을 울린 영화들을 추려봤습니다.
(무순위 입니다)


1.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사랑을 카피하다>

키아로스타미의 <텐>과 <쉬린>을 보고나면 영화적 실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너무 영화가 미니멀해지고 있지 않냐는 데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키아로스타미가 처음으로 외국에서 찍은 장편 영화인 <사랑을 카피하다>를 보면 이 감독이 영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술에서 원본과 복제에 대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복제 예술인 영화를 거론할 때는 항상 대두되는 질문이었습니다. 키아로스타미는 영리하게도 로맨틱 멜로물인 척하면서도 영화의 본질에 대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쓴 발터 벤야민이 살아서 만약 이 영화를 봤다면 어떤 평을 했을지 궁금해지는 영화입니다.  


2. 코엔 형제 <더 브레이브>

상반기 가장 재밌게 본 영화입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모든 씬을 외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코엔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지혜를 가지고 있던 노인이 사라진 시대를 다루고 있다면 이 영화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 즉 사라진 서부에 대한 영화입니다.

많은 평론가들이 정통 웨스턴과 수정주의 웨스턴을 비교하면서 이 영화의 가치를 논했는데요. 정작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할 점은 헨리 하사웨이의 68년 버전이 월남전 시기의 영화이고 이 영화가 이라크전 이후의 영화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게 제 입장입니다. 원작도 월남전 시기에 나왔는데 코엔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특유의 시각으로 살짝 변형해놓았습니다. 근래 보기드문 서부 영화의 수작입니다.  


3. 대런 아르노프스키 <블랙 스완>

아르노프스키의 <레슬러>를 보고 이만저만 실망한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작품인 <블랙 스완>을 보고 난 뒤 문득 이 감독의 영화의 전부를 관통하고 있는 것을 '이카루스의 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뷔작인 <파이>를 다시 보다가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이카루스'에 대한 대화가 나오더군요. 실패한 성공에 촛점을 둔다면 그의 영화 <레슬러>가 실패작은 아닐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4. 우디 알렌 <환상의 그대>

이 영화의 대사 중에 '때론 환상이 신경 안정제보다 더 도움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디 알렌은 영화 마지막에 그 환상을 부숴버립니다. 라캉 버전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때론 상상계가 상징계나 실재계 보다 더 도움이 된다"하면서 실재계를 보여주는 셈이지요. 그런 넉살과 배우들의 연기,힘을 쫙 뺀 빌모스 지그몬드의 촬영, 우디 알렌의 탁월한 스테이징이 눈부신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5. 대니 보일 <127시간>

네. 제가 미친 거지요. 작년에 로드리고 코르테스의 <베리드>를 10 Best에 뽑았을 때, 영화를 즐기는 동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지요. 정작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작품성보다는 다른 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127시간>과 <베리드> 두 영화는 모두 '고립'에 대한 영화입니다. 한 사람은 산악 레저를 하다가 암벽에 끼인 상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라크의 어느 땅 속에 묻힌 상태입니다.

앞의 영화는 가족과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뒤의 영화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127시간>에서 휴대폰 대신 캠코드가 나옵니다. 커뮤니케이션 장치인 휴대폰이 없을 때 영화는 회상과 환상으로 나머지 시간을 이어갑니다.

이에반해 <베리드>는 휴대폰만 있습니다. <베리드>가 고립구조에서 회상과 환상없이 영화를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커뮤니케이션 장치인 휴대폰이었기 때문입니다. 테크놀로지와 관련해서 본다면 <127시간>은 '구글어스'와 연관되어 있고 <베리드>는 '유튜브'와 관련된 영화입니다. 구글어스 시대에 실종자의 모습을 처연하게 보여주는 (구글어스식) 공중 촬영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베리드>는 살아남기 위해 '유튜브'를 이용해서 국가 권력과 거래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휴대폰이 없어)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된 자는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합니다. 그건 대니 보일의 <트레인스포팅>에서 보여주는 환각 상태와 유사해보이더군요. 그리고 싯달타처럼 고행을 거듭한 이후 (우습고 황당하게도) 깨달음을 얻습니다. 주목하시길.. 대니 보일의 이 앞 영화가 인도를 다룬 <슬램독 밀리어네어>입니다.

휴대폰만 가진 고행의 처한 남자는 바로 국가와 거래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국가 권력과 거래를 위해 인터넷 세계인 유튜브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실패합니다.

저는 이런면에서 <127시간>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6. 그리고 우리 독립 영화들 <무산일기>, <애니멀 타운>, <파수꾼>, <짐승의 끝>.... 올해 정말 눈부신 영화들이 한국 영화계에 나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이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독립 영화들을 놓치지 말고 꼭 챙겨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