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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김영진 평론가와 만나서 저녁을 먹으면서 세시간 가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제가 올 상반기 좋았던 영화로 꼽을만한게 뭐가 있냐고 질문을 드렸습니다.

김영진 평론가는 주저없이 이창동의 <시>를 뽑더군요. 이어서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과 캐서린 비글로우의 <허트 로커>도 언급했습니다.

작년에 같은 질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꼽았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아직 소문이 자자한 <인셉션>과 <하얀 리본>을 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가 꼽는 영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건 정말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에 아마 엉뚱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이 영화들을 보고 감동을 먹었습니다.

우선 외국 영화 두편, 한국 영화 두편만 언급하겠습니다.




로랑 캉테의 <클래스>는 프랑스의 중학교에서 9개월 동안 일어나는 영화입니다. 

카메라는 교실 안에서 실제 상황을 찍은 것처럼 교사와 학생간의 기나긴 대화를 보여줍니다.

어찌보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게 보이는 이 영화에서 제가 배운건 현장감입니다.

그것은 무엇이 '시네마틱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과 같았습니다.

카메라는 교사와 학생, 어느 한쪽도 강요하지 않고 중립의 위치에서 바라만 볼뿐인데 큰 파문을 일으킵니다.

9개월간의 수업을 마치고 난뒤 교사와 학생은 교실 밖에서 공을 찹니다.

카메라는 돌연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빈 교실을 보여주는데 교실 밖의 벽에 대고 공을 차는 소리가 쿵쿵 들려옵니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벽 사이에서>입니다. 교사와 학생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이 영화는 이 순간 잡아냅니다.

그것은 영화가 살아있다는 심장 박동처럼 들립니다.




어쩌면 코엔 형제의 걸작은 더 뒤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보다 이 영화가 제게 훨씬 좋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이리 저리 얼킨 플롯을 코엔은 토네이도를 중심에 두고 다 빨아드립니다.

거대한 토네이도 앞에 서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somebody to love를 듣고 있는 소년을 비춘 라스트 씬은 올해의 라스트 씬이 될 것 같습니다.



 

홍상수의 <하하하>는 코미디가 아닙니다. 영화 속의 얼키고 설킨 에피소드들은 눈먼 오디푸스의 후예들의 일화 같습니다.

윤여정은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의붓 아들, 딸로 만드는데 그들은 일종의 근친상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재밌는 것은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나레이터들도 그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화면 영역의 전지적 작가는 죽어버리고, 외화면의 외화면이라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제목(<하하하>)이 크게 그 상황을 비웃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감독의 시니컬한 농담, 또는 불확실한 세상에 대한 공포를 저는 이 영화에서 읽었습니다.





<시>를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이창동의 영화 중의 한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이 영화를 봤을 때 <시>는  시(詩)가 아니라 시(視)고 시(示)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이 어떻게 보이고(示) 어떻게 봐야하는가(視)에 대한 윤리적 질문입니다.

영화는 보는 사람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이고 보여지는 쌍방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미자(윤정희)가 등장하는 첫 장면, 병원 대합실에서 물끄러미 팔레스타인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어서 자살한 소녀의 어머니를 병원 밖에서 전화를 받다가 쳐다보는 미자의 모습이 이어집니다. 

이때까지 미자는 타자를 일방적으로 보는 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소녀의 자살이 자신의 손자와 연관이 되어있음을 알아챘을 때.  미자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미자가 시를 읽는 목소리와 자살한 소녀의 목소리가 겹쳐질 때,

이 세상 모든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영화는 내게 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