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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꽤나 치욕적인 걸” 시민 K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모래알만큼 많은 영화들을 봐왔지만 영화를 보면서 치욕감을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K에게 <써니>는 모래밭에 삐죽 나와 있는 깨진 병과 같았다. 시민 K도 80년대를 살았다. 맞다. 그의 형이나 선배들처럼 치열하게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통과한 80년대는 크기는 작지만 상처 자국으로 오롯이 남아 있었다.

이 영화처럼 향수로만 남아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치욕감이라고 말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아픈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영화가 개봉된 지 꽤 지났지만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이 웃고, 울고 즐거워할 때 K는 좌석 깊숙이 몸을 점점 웅크렸다. 집으로 돌아온 K는 서둘러 컴퓨터를 켰다. 영화의 한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미의 딸이 서재에 몰래 들어와 책 안에 숨겨 놓은 돈을 끄집어내는 장면이 있었다(〔사진1〕참조). 클로즈업으로 보여지는 책 제목은 <현대경제철학 논쟁>.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이 있었던가? K는 인터넷 서점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봤다. 그런 책은 없었다. 그가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책 제목 아래에 ‘대우학술총서 번역 12’라는 것이 쓰여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것을 힌트로 <현대과학철학논쟁>이라는 책을 찾았다. K는 잠시 멍해졌다. 클로즈업으로 책 제목을 보여준다는 것은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뭘까?

감독은 ‘과학’을 ‘경제’로 바꿨다. 그리고 속지를 도려낸 책에서 나미의 딸이 돈을 끄집어내는 장면을 삽입시켰다. 원래 책 제목을 고쳐가면서까지 최종적으로 경제가 승리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서 시쳇말로 돈지랄을 하는 장면들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학술총서를 기획했던 그룹이 부도가 났다. 감독이 미쳐 그 사실만은 지우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K는 피식 웃음이 났다. S선배 같으면 ‘실재의 흔적’하면 또 침을 튀겼겠지.. K가 생각하기에 <써니>는 이 책과 닮아 있었다. 자본의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 역사적 기억을 지우고 왜곡된 사실로 덧칠을 해서 보여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사실 K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불편했다(〔사진2〕참조). 영화는 나미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은 이불을 개고, 딸아이를 깨우고, 아침을 준비하는 거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공간이 K에게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지위를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처럼 비춰졌던 것이다. 나미의 현재 사회적 위치를 전시하는 듯한 이런 장면은 영화에서 숱하게 반복된다. 이때 나미의 지위는 그녀의 능력이나 노력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지위에 기대어 있다는 점이다. K에게 영화 속의 남편은 ‘마친남’(마누라 친구 남편)이었다. 결혼 전에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가 K를 그렇게 기죽게 하다가 결혼 후에는 저런 ‘마친남’이 그의 속을 긁어 놓았다((〔사진3〕참조).

<써니>는 1980년대를 다루는 영화지만, 그 시대의 사회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예컨대 K는 이런 장면이 수상했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time after time이 흐른다. 그 음악은 나미의 남편이 “뉴스 좀 (들을까)”라는 말에 끊어진다. 이 장면은 마치 나미의 세계가 침범 받은 듯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인 나미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시사적(/역사적)인 문제보다는 추억을 더듬는 영화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사회적이고 활동적인 것은 남성, 가정적이고 정서적인 것은 여성이라는 이분화된 성역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K의 머리 속을 퍼뜩 스쳐갔다. 성공한 사업가인 남편을 통해서 나미의 존재가 그려지듯, 80년대는 오늘 날 경제적 승자의 관점에서 가공되어 있다.

K는 나미가 저렇게 부유하게 사는 데도 불구하고 나미의 엄마가 다인(多人) 병실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 의문이 들었다.
왜 감독은 굳이 다인 병실을 고집했을까? 뭔가 꿍꿍이 속이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인 병실이래야 병원 환자들의 반응 쇼트를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위에게 샤넬 핸드백을 선물 받은 나미의 엄마는 환자들에게 사위 자랑을 하다가 이런 말을 늘어놓는다.

“홍서방이 저리 잘 될 줄은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너희 오빠가 저리 될 줄은 어찌 알고? 학교 때 노동운동인가 뭔가 지랄하더만 직원들 월급이나 횡령하고..”

이 대사 약간 뒤에 TV 드라마를 보던 환자들의 반응 쇼트가 있다. TV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남매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환자들은 “에이.. 말도 안돼”라며 과장된 모션을 취한다. 이건 마치 과거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현재에는 사업 실패라는 ‘말도 안 되는’짓을 하고 다니는 오빠를 환자들의 입을 통해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미의 아빠도 그런 비난에 일조를 한다. K가 유심히 본 장면 중에 이런 회상 장면이 있다. TV에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하자 오빠는 “아버지는 언제까지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파쇼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할거냐”라고 말한다. 이 말에 아빠는 “그러면 니 술값이랑 학비는 니가 벌어서 써”라는 말로 일축해버린다. 사회의 운동권이 가정의 기생충으로 전락하는 그 장면에서 K는 씁쓸함을 느꼈다. 오빠에 대한 비난은 계속 이어진다. 현재의 오빠는 외국 노동자들 등치고 다니는 악덕 기업가로 변해 있다.

19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멸시는 여고생들의 패싸움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사진4〕참조). 라이벌 학교의 7공주들이 패싸움을 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날이다. 잠시 후 전경과 시위대가 엉키고 여고생들끼리 엉켜 싸우는 장면을 코믹하게 보여주는데 이때 흐르는 음악은 touch by touch이고 영화관 간판에는 <록키 4>가 붙어 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학생들의 패싸움 수준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멸시는 자본의 승리다.

K가 보기에 자본에 대한 찬양은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극에 달했다(〔사진5〕참조). 병을 앓다가 죽은 7공주의 리더 춘화가 (하필이면) 엄청난 재력가이고 (하필이면) 유산을 상속 받을 가족이 없어서 친구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는 그 장면! 그녀들이 80년대에 꿈꾸었지만 못다한 것을 2011년에 개인적인 노력이 없이 춘화의 돈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K에게는 7공주들의 춤이 자본주의라는 신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간증 기도회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미의 딸이 불량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왕년의 ‘써니’파 4명은 똘똘 뭉쳐서 불량배들을 늘씬하게 패주고 당당하게 경찰서에 잡혀간다.(〔사진6〕참조) 그녀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법과 윤리가 아닌 폭력에 의한 것이다. 경찰에 잡혀가는 그들은 즐겁다. 나미와 춘화의 돈으로 금방 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K에게 이 장면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자기 아이가 술집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맞았다고 불량배를 불러서 응징하게 한 재벌 이야기 아닌가? 현실에서는 그 재벌의 행위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는데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K는 <써니>의 감독이 세상을 참 가볍게 바라본다고 느꼈다. 이 영화에는 지역감정에 대한 부분을 슬쩍 보여준다. 나미가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싫어했던 친구와 나미가 화해를 하는 부분인데, 거기서 소주 몇 병으로 지역문제를 해결해버린다. 세상이 면도 거품만큼이나 가벼운 것이다. 사실 K에게 이 영화가 못 마땅한 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까도 까도 속이 보이지 않을 만큼 문제 거리가 겹겹이다. 이제 엇비슷하게 잘라내서 잘라낸 부분만 벗겨내고 나머지는 다음에 써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K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벗겨낼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그가 보기에 <써니>에는 관객의 감정선과 무관하게 억지로 붙여 놓은 쇼트들이 있었다. 예컨대 말기 암환자인 춘화가 침대 시트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 할 때, 나미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이때 감독은 두 사람을 투 쇼트로 한꺼번에 잡지 않고 아픔 때문에 울부짖는 춘화의 쇼트와 눈물 흘리는 나미의 반응 쇼트로 분리시켜 보여준다(〔사진7〕상단 사진 참조). 비슷한 장면은 나미와 장미가 술집 작부로 전락한 복희를 만나러 간 씬에서 나온다. 복희가 눈물을 흘리며 신세를 한탄할 때 옛 친구인 나미와 장미가 따라서 우는 반응 숏이 있다(〔사진7〕하단 사진 참조).

K는 두 씬의 편집이 매우 엉성하다고 생각했다. K는 처음엔 이것이 설정 쇼트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설정 쇼트의 부재가 한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관객이 쉽게 동화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설정 쇼트의 문제가 아니라 반응 쇼트의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쇼트에서 관객이 충분히 공감하기 전에 반응 쇼트에서 배우가 먼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즉 반응 쇼트를 통해 관객에게 눈물과 감동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반응 쇼트의 폭력, 눈물의 앵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K와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K의 예측대로라면 배우의 너무 이른 감정 반응에 거부감을 느껴야 하는데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K는 그것이 의아했다. 왜 이런 감동의 강요에 관객들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쉽게 눈물을 흘릴까? 이미 그런 편집에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K는 프로 가수들이 순위 경쟁을 벌이는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가 떠올랐다. 그 프로에도 유사한 장면들이 있는 것이다. 무대에서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관객석의 반응 쇼트들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사진8〕참조). 반응 쇼트에서 객석의 사람들이 운다. 그리고 가수의 노래와 관객석의 우는 사람들을 보고 이제 시청자가 따라 우는 것이다. 음악보다 더 강한 이미지의 폭력!

쇼트와 쇼트를 연결하는 이런 방식의 편집은 주로 회상 장면에서 나타나는 씬과 씬의 연결, 시위와 패싸움에서 나타나는 한 공간에 두 가지 사건의 충돌에서 반복된다. 앞의 반응 쇼트가 감정의 강요라면, 뒤의 두 가지는 역사적 기억의 말소와 개인적 추억의 강요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K는 생각했다.

이 영화의 쇼트가 가지는 특징 중에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꿇어앉는 쇼트들이 이상하게도 많다는 것이다. 나미가 전라도 벌교에서 전학을 와서 자기소개를 한 뒤 넘어졌을 때 금방 일어나지 않고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말을 한다. 나미와 그녀의 딸이 서재에서 마주쳤을 때 나미는 무릎을 꿇는다(〔사진9〕상단 사진 참조). 그리고 춘화의 유산 상속이 진행될 때 모두 꿇어앉아서 듣고 있다(〔사진9〕하단 사진 참조). K는 인간의 앉은 모습이 이렇게 굴욕적일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를 떠올랐다. 오즈 감독이 사람의 앉은 모습을 찍을 때 카메라의 위치는 앉아 있는 사람의 높이보다 더 아래에 둔다. 이른바 다다미 쇼트라는 것인데 그것이 스크린에 나타났을 때 영화 속의 인물은 기품이 느껴진다. 그것이 오즈 감독이 삶과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다(〔사진10〕참조). <써니>는 어떤가? 이 영화는 인물이 꿇어앉을 때 카메라는 그 인물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사람을 그렇게 아래로 보는 이런 시선은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감독의 눈높이와 일치하는 게 아닐까?

죽어가는 80년대를 살려서 따뜻한 햇살을 비추는 영화 <써니>. 이 영화는 관객들의 복고 취향에 맞추어 80년대를 스케치했기에 K는 시대에 대한 통각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80년대는 결코 따뜻한 시대가 아니었다. K의 80년대는 비록 음악다방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킬킬대거나 다투었지만 끌려가는 대학생 형과 누나를 보면서 가슴 조려했고 최루탄 연기로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남아 있다. 그 시대의 통각이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써니>의 감독이나 이 영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덤벼든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를 위해 죽자고 달려든 사람들을 조롱하며 웃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비열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K가 느낀 굴욕감의 정체이다.

영화는 나미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 맑은 눈으로 볼 때 1980년대는 영화에서처럼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K는 생각했다.

밤이 깊었지만 K는 너무 많은 생각에 쉽게 잠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