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이렇게 길게 적으려고 안했는데 쓰고보니 두서없이 길어졌네요. 생각하기에 따라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민하신 분들은 영화나 소설을 보기 전에 읽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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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쳐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드디어 개봉되었습니다. 저도 어제 저녁에 이 영화를 봤습니다.
핀쳐의 이번 작품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대동소이합니다. 즉 스티그 라르그손의 원작에 나타나는 나치즘과 반여성주의에 대한 부분이 약하다거나 스웨덴판 <밀레니엄>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를 비교해가며 원작의 장점을 못살렸다고 지적하는 것은 해묵은 이야기입니다. 소설과 영화는 영역이 다릅니다. 소설에서 상세히 다룰 수 있는 부분들은 영화에서 당연히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스웨덴판과 비교해서 스웨덴 버전이 데이빗 핀쳐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것도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스웨덴판을 보면서 제가 들었던 느낌은 연출의 디테일한 통제가 안 이루어져 산만한 느낌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배우들 곁으로 지나가는 엑스트라들의 동선을 통제 못하고 있습니다. 사운드도 포인트가 없고 촬영이나 편집도 타이트한 맛이 떨어집니다.

뭐 이런 걸 지적하기 보다는 그냥 데이빗 핀쳐의 <밀레니엄>의 우수한 점을 언급하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일단, 핀쳐는 이 영화에서 중점을 둔 것은 연쇄살인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두 주인공(미카엘과 리스베트)와의 '관계'에 촛점을 두었다고 합니다. 데이빗 핀쳐는 전작인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페이스북이라는 인터넷상의 '관계'에 대해 주목을 했다는 점을 상기해두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 뛰어난 교차편집

두 인물의 '관계'에 촛점을 두었기에 이 영화는 상당수의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교차편집의 교본과 같은 영화입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각각의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영화 중반까지 두 인물은 만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뛰어난 교차편집을 보여 주는 장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리스베트가 새로운 후견인에게 강간 당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성추행은 두번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영화적으로 테크닉이 잘 발휘된 장면들입니다. 리스베트에게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성추행 장면, 그러니까 두번째 성추행 장면을 두고 이야기 해볼께요. 이 장면 앞에 미카엘은 40년전에 일어난 하리에트 실종 사건의 단서를 찾고 있습니다. 미카엘이 신문사의 기록 사진들을 찾고 있는데 그곳에 근무하는 여자 직원이 그 기록들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 때 미카엘이 말을 하죠. "나이로 봐서 이 사건을 알고 있을 연령이 아닌데요" 그때 그 여직원의 대답. "(그 사건은) 어릴 때부터 낯선 남자를 조심하라는 훈계로 삼았지요 "  이 다음 장면에서 리스베트가 낯선 남자(새로운 후견인)에게 강간 당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두 씬이 마치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간단한 장면이지만 저는 여기서 "아~"하고 탄식했습니다. 그 보다 더 놀라운 것은 리스베트가 후견인에게 강간당하면서 울부 짓고 있을 때, 미카엘은 하리에타가 남겨 놓은 테이프에서 하리에트가 성경공부를 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대단히 중요한 장면인데 리스베트와 미카엘과의 '관계'를 하리에타라는 실종된 인물을 매개해서 이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베트와 하리에타는 두 사람 다 강간 피해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카엘이 하리에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리스베트가 선뜻 승낙한 것도 두 사람은 동일한 아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공의 본격적 만남이전에 이런 식으로 연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영화에서 교차편집은 두 인물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사건을 회상하면서 보여줘야 하기에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차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놀라운 것은 미카엘이 사건 보고서를 읽어갈 때 그 보고서의 글과 과거 사건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과거의 사운드는 들리지 않습니다.
과거 사건 회상장면을 마치 무성영화처럼 보여주는 시도도 참신한 선택이죠.



- 사운드의 탁월한 사용

타이틀 시퀀스에 레드 재플린의 "Immigrant Song"이 나올 때부터 귀가 뻥뚫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사운드 디자인이 탁월했던 장면은 다음 장면들입니다. 리스베트가 후견인에게 오럴섹스를 강요당할 때 장면을 기억해보세요. 이 장면은 굉장히 이상하게 찍혀 있는데 리스베트가 후견인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뭔가 "윙~~"하는 소리가 들리지요. 그 소리는 리스베트가 오럴섹스를 할 때도 계속 이어집니다. 리스베트가 사무실에서 굴욕감을 느끼며 나올 때 그 소리의 진원지가 정확히 보여줍니다. 복도에서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하는 할아버지를 보여주지요. 그 다음 장면에서 집으로 돌아 온 리스베트는 담배를 피우며 복수를 계획합니다. 그 다음 씬에서 미카엘이 증거를 찾으로 영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공청소기의 소리가 비행기 소리로 그리고 영국에 도착해서 미카엘이 택시를 탈 때 택시 소리로 쭉 이어집니다. 데이빗 핀쳐가 사운드와 영상을 어떻게 붙여 나가는지를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마술같이 씬들이 달라붙습니다.



-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액션씬

이 영화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액션 씬은 보고나면 박수를 치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합니다. 리스베트가 노트북을 들고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다가 소매치기를 당하자 재빨리 소매치기를 따라가 격투를 벌이고 노트북을 찾아서 황급히 지하철을 타고 떠나는 장면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보통 감독 같으면 액션을 화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지하철을 수백미터 달리고 여러가지 액션을 보여주려고 할 것입니다. 핀쳐는 여기서 에스컬레이터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이 두 상황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에스컬레이터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50초 동안 31개의 숏(저는 이 영화를 아직 한번 봤습니다. 제 기억으로 서른 한개의 숏이었습니다)으로 액션을 만들어 내는 것도 놀라운데, 여기서 지하철 안의 소음만 넣고 다른 대사나 사운드는 다 생략해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성영화와 같이 보일 수 있는 이 이상한 액션씬도 이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매력 중에 하나입니다.








- 카메라와 조명의 영리한 활용

리스베트가 후견인의 집을 찾아 갔다가 강간 당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현관 문 밖에서 트랙아웃합니다. 카메라가 강간 당하는 리스베트를 점점 멀어지듯이 보여주면서 함정에 빠진 리스베트의 절망적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카메라 움직임은 여기서 한번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핀쳐는 영리하게도 이 카메라 움직임을 리스베트가 후견인에게 복수하는 씬에서는 역으로 사용합니다. 즉 현관 문을 향해 카메라가 트랙 인해들어 가는 거죠.  그리고 다시 후견인의 절망감을 보여주기 위해  트랙아웃을 사용합니다. 트랙 아웃- 트랙 인- 트랙 아웃의 카메라 무브먼트로 습격과 역습, 피해자와 가해자의 전환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리스베트가 강간당할 때와 후견인에게 복수할 때 카메라의 위치를 눈여겨 보시길 바랍니다. 앞에서는 하이 앵글 위주로 처리에서 리스베트의 절망감을, 뒤의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로우 앵글에 위치시켜 리스베트가 화면을 압도하며 분노를 표출하게 합니다. 

영화 도입부를 보면 미카엘은 법정에서 패소합니다. 이때 화면은 세피아 톤에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 수록 차가운 블루 톤으로 바뀌면서 눈이 내립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서늘한 분위기의 화면들은 탄성이 나오게 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을 강하고 따뜻하게 사용한 씬은 어디일까요? 미카엘이 자신을 방문한 딸에게서 우연히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힌트를 얻었을 때입니다. 눈여겨 봐야 할 부분들입니다.




- 소도구 사용의 유닉크함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남과 여, 40대와 20대, 밝음과 어두움. 미카엘이라는 이름은 천사장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미카엘은 정의의 사도이며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아폴로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 리스베트는 알파벳 E자가 빠진 엘리자베스. 암흑 세계의 여왕. 그리고 리스베트는 레스포스 섬 사람들. 레즈비언을 연상케합니다.(그래서 그녀는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레즈비언 섹스를 합니다) 리스베트는 또한 리바이어던의 다른 이름입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은 바닥까지 닿았다가 다시 올라옵니다. 미카엘은 부패기업에 대한 기사를 쓰다가 역공을 당하고 리스베트는 후견인에게 성추행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지요. 두 사람의 가족은 붕괴되어 있습니다. 미카엘은 이혼을 한 상태이고 리스베트는 아버지 몸에 불을 지른 과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유사성은 외관에서도 나타납니다. 피어싱을 한 리스베트에게 후견인이 묻습니다. "네 눈에 한 피어싱이 근사해 보이냐? " 여러 피어싱 위치 중에서 눈썹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중반에 미카엘이 저격 당했을 때 찢어진 자국은 리스베트와 마찬가지로 오른 쪽 눈썹 위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후드티를 입은 리스베트의 모습이 비니 모자를 쓴 미카엘과 유사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리스베트와 미카엘 모두 눈썹이 없기에 더 닮아 보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것은 미카엘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리스베트의 집을 아침 이른 시간에 방문하면서부터입니다. 처음에 리스베트는 그녀의 닫힌 마음처럼 미카엘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미카엘이 집안으로 들어서서 사온 아침을 같이 먹자고 했을 때 리스베트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고 난뒤 리스베트가 아침을 차리는 장면도 사랑스런 장면입니다. 리스베트가 바랬던 것은 가정이고 가족이었던 것이지요.


이 영화에서 소도구 사용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담배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미카엘이 패소하고 나서 담배가게에 들러 담배와 라이터를 사고 한번 피고 난뒤 바로 버립니다. 이 장면을 통해 그가 예전에 담배를 끊었는데 속이 상해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저는 이때까지는 굳이 왜 저 장면을 넣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리스베트가 담배를 피울 때, 미카엘이 담배를 밖에서 피우라고 나무라죠. 두 사람의 '관계'가 서서히 좋아질 때 같이 집 밖에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피웁니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난 뒤에는 하나의 담배를 번갈아 피우죠. 영화의 결말 부분에 가서 미카엘을 다시 만난 리스베트가 그에게 담배를 권하자 미카엘이 끊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담배라는 소도구를 가지고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는 거지요.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관계가 정리되었다는 것은 담배 말고 가죽 잠바를 통해서도 보여줍니다. 가죽 잠바를 입은 젊은 시절 미카엘의 사진을 본 리스베트는 그에게 펑크 족의 상징인 가죽잠바를 선사할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고 이내 선물을 버립니다.



-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영화에서 '관계'는 좁게는 두 주인공간의 관계지만 넓게는 가족, 그리고 유럽의 구세대와 신세대와의 관계까지 확장됩니다. 거기에는 나치즘을 옹호한 구세대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네오나치즘의 신세대의 관계도 포함됩니다. 하리에타가 나치즘에 물든 가족을 만나지 않고 헨리크 삼촌을 만났다면, 리스베트의 처음 후견인이 건강해서  성도착의 후견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겁니다. 이 영화의 이런 부분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원작자가 통렬히 비판했던 나치즘과 반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쉽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