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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에 여러차례 <건축학 개론>에 대한 글을 조금씩 올렸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저의 기본입장은 '잘만든 영화지만 손발이 오글거리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정도의 인상이 전부였습니다.

어제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건축학 개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분이 하신 말씀 "이 영화는 어쩌면 제주도에 만들어진 그 집을 찍기 위해 만든 영화인 것 같아. 왜 그 집이 멋지잖아 바다가 보이도록 창을 넓게 터놓은 그집"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내가 놓쳤던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저도 그 장면을 기억하죠.
하지만 영화 전체를 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놓쳤던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사랑한 사람과의 약속(또는 과거의 부채)를 지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약속이 제주도의 리모델링한 집으로 나타나는 거지요.

승민과 서연이 같이 듣는 수업은 영화 제목과 같은 "건축학 개론"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한 학기가 끝날 무렵에 미완성의 건축물처럼 끝나고 맙니다.
미완성 건축물은 비유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연의 제주도 집이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서연의 피아노방을 만들려다가 방치된 채로 남아있는 것이죠.

승민과 서연이 이루지 못한 사랑이 승민이 리모델링해주는 건축물로 재현되는 것은 물론 도식적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건축학 개론"의 첫시간에 늦게 수업에 들어온 서연이 승민의 시야에 걸립니다.
승민은 한 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첫수업 때 교수님이 칠판에 서울 지도를 펼쳐놓고 자기 집을 표시하라고 합니다.
승민은 서연이 그어놓은 길표시에 자기 집과 겹치는 것을 보고 흠짓합니다.
이 장면이 재밌는 건  지도에 선을 긋는 것이 건축 설계도를 펼쳐놓고 설계를 구상하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건축도 설계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민이 수업 과제를 위해 카메라로 자기 동네 모습을 찍고 있을 때 승민의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은 서연입니다.
카메라라는 세상에 들어온 서연, 승민은 시야를 다 채워버리는 서연.

그리고 두 사람은 동네 빈집을 찾아갑니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예쁜 집.
두 사람만이 아는 비밀의 장소. 그 장소에 서연은 예쁜 꽃들을 키웁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 이 집에서는 창이 보이지 않습니다.
첫사랑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요? 상대방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 정도로  아직 성숙하지 않는 상태에서 가슴 졸이며 하는 사랑.


두 사람은 그 시절 자신의 속내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서연에게 승민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서연과 승민이 교외로 나들이를 갔을 때 늦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서연이 소변이 급하다고 합니다.
정류소 뒷편에서 용무를 해결하려 하며 서연이 그때 무심코 내뱉는 대사.
"너도 저쪽에 가서 돌아서 있어.. 하지만 너무 멀리 가서는 안돼" 
사랑이 너무 급하게 다가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이 떠나가는 것에 대한 무서움. 
서연이 승민에게 품고 있었던 감정은 이런게 아니었을까요?

서연이 자취방을 옮겼을 때 자취방은 반지하 원룸입니다.
그 방의 창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조입니다.
승민은 서연과 선배가 술이 취해 서연의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랑을 끝내야 함을 직감합니다.
그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창밖에서 반지하 방안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이런 건축구조를 생각해보면, 영화의 마지막에 승민이 약속대로 서연에게 집을 지어줄 때 왜 창을 그렇게 넓게 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첫사랑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창, 열 수 없었던 창이 이제는 바다를 다 받아들일만큼 넓어진 것입니다.
제주도 집의 그 창문은 승민의 프레임, 승민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 집에 승민은 서연의 피아노방을 1층에 만드는 대신 2층에 서연이 지낼 방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 2층 옆으로 빈집에서 죽어간 화초들이 푸르게 피어납니다.
반지하에서 2층으로 올라간 그 방. 그것은 서연에 대한 승민의 사랑이자, 승민의 성숙의 높이이기도 합니다.

영화 중반에 서연이 승민과 제주도집을 둘러보며 스쳐지나가듯 한 이야기. 
어린시절 서연의 아빠가 마당에 세면대를 만들려고 했는데, 시멘트가 굳기 전에 서연이 발을 대어서 발자국이 남았다는 에피소드.
그 이야기를 승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리모델링 후 발자국이 남긴 세면대를 작은 연못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첫사랑의 추억같은 예쁜 연못으로 말입니다.


p.s) 영화를 보다보면 겉멋이 들어 함부로 영화를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제 무심코 들은 이야기에서 <건축학 개론>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 한번 더 봐야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