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0.

영화광이란 영화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또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건 전혀 이상한게 아닙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봅시다. 이 곡 저 곡 가리지 않고 무조건 듣기보다는 같은 곡을 여러 번 듣는 쪽이 훨씬 많으니까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많은 영화를 안봅니다. 솔직히 흥행을 전제로 만들어진 웰 메이드 영화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편입니다.

평소에 친구처럼 지내는 모대학 영화과 교수님이 지난 주에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다짜고짜 <써니>를 봤느냐고 묻더군요. 전혀 관심이 없는 영화였기에 안 봤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는 영화라고 대답을 했지요. 그러자 이 교수님은 꼭 한번 보라고 신신당부를 하더군요. 자기는 이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영화가 700만명이라는 관객 동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80년대를 살아 온 그 분에게 이 영화는 치욕적인 영화라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하길래 결국 계획에도 없었던 <써니>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그 분과 마찬가지로 심한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제가 느낀 굴욕감의 정체를 밝히는 글입니다. 글의 전개상 편의를 위해 평어체로 쓴 점 양해바랍니다.

1.

영화는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주인공 임나미(유호정)는 6시에 맞추어 둔 자명종 소리를 듣고 일어나 이불을 개고, 딸아이를 깨우고, 아침을 준비한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공간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지위를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처럼 상류층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드러낸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싱크대 라디오에서) 흐르는 곡 time after time은 식탁에 앉은 남편의 “뉴스 좀 (들을까)”라는 말에 끊어져 버리는데 마치 그녀 자신의 세계가 침범 받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그녀가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대립적인 것처럼 보게 만드는데 이 영화의 전체적 성향과 일치하는 것이어서 이 장면은 중요하다.

2.

남편이 출근하면서 병원에 입원한 장모와 아내에게 핸드백을 선물하고 딸에게 고액의 용돈을 주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나미와 남편의 경제적 지위가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이들 부부의 지위와는 걸맞지 않게 나미의 엄마는 다인 병실을 사용하고 있다. 왜 감독 은 굳이 다인 병실을 고집했을까? 정답은 당연하게도 다인 병실이래야 병원 환자들의 반응 쇼트를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환자들의 반응 쇼트는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다음 장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샤넬 핸드백을 선물 받은 나미의 엄마는 환자들에게 사위 자랑을 하다가 이런 말을 늘어놓는다.

“홍서방이 저리 잘 될 줄은 어떻게 알았겠어? 그리고 너희 오빠가 저리 될 줄은 어찌 알고? 학교 때 노동운동인가 뭔가 지랄하더만 직원들 월급이나 횡령하고..”

이 대사 약간 뒤에 TV 드라마를 보던 환자들의 반응 쇼트가 있다. TV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남매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환자들은 “에이.. 말도 안돼”라며 과장된 모션을 취한다. 이건 마치 과거에 노동운동을 하다가 현재에는 회사를 꾸리다가 실패한 오빠를 탓하는 것처럼 들린다. 환자들의 반응 쇼트가 80년대 노동운동을 비난하는 것이 첫 번째 기능이다.

이와 유사한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역시 TV 드라마를 보는 환자들이 드라마 속의 여주인공이 불치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이 밝혀지자 “에이.. 말도 안돼”라는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 나라 TV 드라마 속의 상투적인 출생의 비밀과 시한부 인생이라는 소재가 왜 뜬금없이 이 영화에 불쑥 끼어들까? 그건 7공주 ‘써니’파의 일원들이 ‘가족’과 같은 존재이며 그 중 한명이 ‘시한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환자들의 반응 쇼트가 노동운동을 비아냥거리는 기능을 할때 영화는 비열해지며, 7공주들의 유대관계와 운명을 암시할 때 황당해진다.

3.

첫 번째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나미의 회상 장면에 나오는 오빠와 아빠의 대화가 있다. TV에 전두환의 얼굴이 나오자 오빠가 “아버지는 언제까지 공무원으로 있으면서 파쇼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할거냐”라는 말에 아빠는 “그러면 니 술값이랑 학비는 니가 벌어서 써”라는 말로 일축해버린다. 1980년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멸시는 여고생들의 패싸움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라이벌 학교의 7공주들이 패싸움을 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날이다. 잠시 후 전경과 시위대가 엉키고 여고생들끼리 엉켜 싸우는 장면을 코믹하게 보여주는데 이때 흐르는 음악은 touch by touch이고 영화관 간판에는 <록키 4>가 붙어 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학생들의 패싸움 수준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멸시는 자본의 승리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나미의 딸이 아빠의 서재에서 돈을 훔쳐가는 장면에 등장한다. 아빠의 비상금은 <현대정치 철학> 책을 도려내고 만들어 놓은 저금통(?)에 들어 있다. 관념/이상은 패배하고 물질/자본이 승리한 것이다.

4.

가족과 같은 7공주의 끈끈한 유대는 나미의 딸이 불량 여고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극에 달한다. ‘써니’파 4명이 불량배들을 늘씬하게 패고 경찰서에 잡혀간다. 그들의 자식 또래의 고등학생들에게 행한 방법은 도덕적인 방법이 아닌 폭력이다. 경찰에 잡혀가는 그들은 즐겁다. 나미와 춘화의 돈으로 금방 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자기 아이가 술집에서 실갱이를 벌이다 맞았다고 불량배를 불러서 응징하게 한 재벌 이야기 아닌가? 현실에서는 그 재벌의 행위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는데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찬양을 한다.

5.

자본에 대한 찬양은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반복된다. 병을 앓다가 죽은 7공주의 리더 춘화가 (하필이면) 엄청난 재력가이고 (하필이면) 가족도 없어서 친구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준다. 그녀들이 80년대에 가지고 있었지만 못다한 꿈이 개인적인 노력이 없이 돈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6.

죽어가는 80년대를 살려서 따뜻한 햇살을 비추는 영화 <써니>. 관객들의 복고 취향에 맞추어 80년대를 스케치했기에 이 영화는 시대에 대한 통각이 없다. 80년대는 결코 따뜻한 시대가 아니었다. 내 기억에 80년대는 비록 음악다방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킬킬대거나 싸웠지만 끌려가는 대학생 형과 누나를 보면서 가슴 조려했고 최루탄 연기로 눈물을흘렸던 통각이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1980년대에 모두가 정치 의식이 있었던게 아니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건 자신의 생각 없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전국민이 다 일어났던 6.10민주화 운동이 어찌 가능했을까?

또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덤벼든다”고 비판을 일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화를 위해 죽자고 달려든 사람들을 조롱하며 웃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내가 느낀 굴욕감의 정체이다.

7.

영화는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잠에서 깨어난게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 맑은 눈으로 볼 때 1980년대는 영화에서처럼 죽지 않았다. 그건 언제나 우리들 삶의 토양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의 주인공인 나미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말고 이 영화에 대해 분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