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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력으로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해가 바뀌는 즈음에는 사람은 모두 자기가 한 해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또 한 해 새로운 삶을 기획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것도 그 까닭의 하나이다. 옛 사람도 삶의 고비마다 자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뉘우치고 새롭게 더 나은 내일을 다짐하였던 모양이다. 그 진솔한 자기 독백의 글을 하나 읽어보자. 



  옛 사람이 모두 지난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한 것은 대체로 지난 잘못을 마음 아파하고 앞으로 착하게 살려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성인과 현자들이 모두 뜻을 두고 공부하였던 것이다. 나만 어찌 홀로 그리 하지 않겠는가! 시를 읊조리는 여가에 멀리 19년 전의 일부터 서술한다. -중략- 처음에는 여러 해 동안 게으름과 방탕함이 고질이 되어 배움은 성취하지 못하고 나이만 많아진다고 여겨 마음이 매우 아팠다. 겨울 동안이라도 부지런히 학문을 닦을까 했으나 뜻을 굳게 세우지 못하였고 굳어진 버릇을 없애지 못하여 시간만 잡아먹고 허송세월을 하였을 뿐이었다. 아! 내가 태어난 해의 정월 초하루는 기묘일(己卯日)이었는데 지금 백 열 한 번째 기묘일을 맞는다. 유학을 공부한 날이 근래부터가 아니고 태어나 살아온 햇수도 적지 않은데 포기하고서 자립할 바를 계획하지 못하였다. 내가 매우 무지하였다! 그 또한 좋은 쪽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뒤미처 생각하니 분하고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이로부터 분한 생각과 괴로운 마음에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지나온 시간과 내 행실을 헤아려보니 슬픔이 가슴을 가득 메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지나온 일을 차례로 엮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자취를 밟아 한편으로는 경계를 삼고 한편으로는 권면을 삼으며 또 스스로 내가 좋지 않은 때에 태어났음을 슬퍼한다. 이 말들은 모두 지난날의 자잘한 일로서 과실을 경계하고 공부에 나아가지 않았던 일들을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는 것일 뿐, 말로 표현하지 않은 내용까지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러하나 늘 내 눈과 귀에 접하게 하여 옛날의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고 오늘날 성취하지 못한 점을 돌아보아 개연히 마음에 두고 버리지 않는다면 자극을 받아 떨쳐 일어나는 효과를 봄에 반드시 적으나마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일들은 마음에 이미 충분히 계획하였고 본래 쉽게 글로 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서 마침내 다시 말하지 않는다.

[古人莫不訟前咎以自箴, 蓋悼前之失, 而起後來善思也. 是皆聖人賢士之所寓意用功者. 吾何爲獨不然? 歌詠之餘, 丕遠惟十九年前事. -중략- 初謂自數年來, 惰放成痼, 學未克就, 而年且壯, 甚軫于懷. 庶冬朔勤修, 而立志不固, 結習未除, 玩愒流光, 虛度日月而已矣. 嗚呼! 余生之歲正月己卯朔, 今已百有一十己卯矣. 業儒之日, 不爲近矣, 降生之載, 不爲少矣, 棄之而未嘗及謀所立. 甚矣! 余之無知也. 其亦不善變矣. 追思之, 可爲扼腕痛心. 故自此以來, 慨懷勞思, 中夜起坐, 度時揣已, 悲來塡膺, 言之不可已. 乃編次往事, 跡其所踐之如何, 一以爲戒, 一以爲勸, 而又自悲我生之不辰也. 抑是言也, 皆前日小小之事, 靡有警過失造工夫者, 蓋記不忘耳, 非所與論於言之外也. 雖然, 使之常接乎吾之耳目, 思昔伊艱, 顧今無成, 慨乎其存乎心而不舍, 則其於感勵激發之效, 亦未必無少補云耳. 其他事意, 心計已熟, 固未易與泓穎謀也. 遂不復言.]


 
-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자경설(自警說)〉, 《고봉집(高峯集)》
 
 
                             
 
 

 
 
  낮과 밤이 서로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것은 저절로 그러한 현상일 뿐이다. 수천 년, 수만 년, 수억 년을 그렇게 해는 제 가는 길을 높이 잡았다가 낮춰 잡았다 하고, 달은 또 그렇게 찼다 이지러졌다 하였다. 그렇게 시간은 밑도 끝도 없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이름 있는 날의 마디[名節]라 하여 삼백 예순 여느 날과 특별히 다를 것도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날의 마디마다 무어라, 무어라 이름 붙여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했다. 요즘이야 날을 알려주고 시간을 일깨워주는 물건이 쌔고도 쌨지만 예전에는 해의 높낮이로, 달의 크기로, 그림자의 길이로 계절의 변화와 나달의 오고감과 시간의 흐름을 알았다. 그러니 마디를 지어주는 이름이 없어서야 어디 날과 달과 계절이 흐르는 까닭을 알겠으며 그 의미를 붙잡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한 해가 바뀌는 고비를 중시하였던 게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나 봄이 시작하는 기점을 중심으로 한 해가 새로 시작한다고 보았던 게다. 살아온 한 해를 보내고 새로 또 한 해를 맞이하는 때가 되면 누구라도 온갖 상념에 젖고 얼마간 경건해진다. 한 해를 살면서 일어난 갖가지 일을 돌아보고 저지른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뉘우치고, 새해에는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각오도 새롭게 다진다. 고봉 기대승이 열아홉 나이에 남긴 〈자경설〉은 그래서 한 해를 새로 시작하는 즈음에 읽어봄직하다. 옛 현인의 글을 경건하게 받들어 읽지 않고 읽어봄직하다 말하다니 버릇없고 건방진 고얀 놈인가? 옛 사람의 글이라 하여 높이 받들지 말고 글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자. 그래서 글맛을 곱씹고 글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자. 그러자면 아무리 고봉 선생님의 글이라도 우리 주위에 살아있는 열아홉 청년의 글로 읽어야 할 터이다.

  요즘 열아홉 나이라면, 나이든 어른의 눈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철없는 세대이다. 고등학교 3학년 또는 대학교 1학년. 내 10대와 20대를 돌이켜 보아도,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기까지는, 아니 군대를 갖다 와야 철이 들었다. 철든다는 게 무슨 말인가? 구구하게 말할 것도 없이 제 앞가림을 자기가 하고, 자기 삶의 계획을 스스로 세워서 꾸려가는 정도가 아닐까? 옛날이야 10대 후반에 혼인을 하고 자기 살림을 꾸렸으니 요즘 10대, 20대보다는 애초에 일찍 철이 들었던 게다. 우리 고3 아이들 나이에 기대승은 열아홉 해 살아온 삶의 고비를 꼼꼼하게 돌아보고 자기를 경계하는 글을 썼다.

  기대승은 〈자경설〉에서 허송세월을 했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지나온 삶의 허물을 되뇌어 보고 곱씹는 것은 그런 과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기대승은 여러 가지 인간적인 약점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대승은 이황으로부터 신진사림의 대표로 인정을 받았고 실제로 명종 말에서 선조 초에 신진사림의 영수(領袖)로 활약하였다. 이황은 학문을 하는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선조의 부탁에 기대승을 천거하였을 정도였다. 이처럼 이황은 기대승을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표로 촉망하였으면서도 그의 인물을 더 다듬기 위해 뛰어난 자질을 함부로 드러내고 호탕한 습성에 얽매이고 술에 괴로움을 당하고 방종한 놀이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사실 기대승은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로서 지적인 영민함을 드러내기 좋아하였고 이론논쟁에서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병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이는 《경연일기》에서 기대승을 재주는 호매(豪邁)하나, 기질은 거칠어서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아주 높아서 선비를 경시하며, 자기와 견해가 다른 사람은 미워하고 같은 사람은 좋아하니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되면 그 집요한 병통으로 인하여 장차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 문순공(文純公, 이황) 같은 현자도 천거한 바가 이와 같았으니 사람을 아는 일이 어렵다고, 사람을 잘못 알아보았다고 이황까지 싸잡아 비평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기대승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여러 번 드러냈다.

  기대승은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가운데서도 탁월한 학문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이황과 논쟁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중국 주자학에 연원을 둔 조선 성리학이 제 모습을 갖고, 제 소리를 낸 명실상부한 조선의 학문으로 꽃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젊은 기대승이 학계의 원로인 이황에게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기대승의 이런 오연(傲然)한 기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의 어떤 성향이나 성격이라도 그 자체 선하거나 악하다기보다 어떻게 표현되고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에 따라 인격성장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인격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거창하게 철학적 사색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삶을 늘 돌아보며, 순간순간 자기 행위를 곱씹어 볼 일이다. 공자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서부터 30세에 자립하여 70세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규범을 어기지 않았다고 자기 삶을 정리한 구절은 실제 공자의 삶을 회고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나이 30, 40, 50, 60, 70에는 그런 경지를 지향해야 한다는 삶의 이정표로도 읽을 수 있겠다. 공자가 칭찬한 거백옥(蘧伯玉)이라는 현자는 나이 쉰에 마흔아홉 해의 잘못을 알았고, 예순에 예순 번 변화하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이렇게 많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하였다는 말은 자기 삶을 치열하게 성찰하고 반성하였다는 말일 게다. 굳이 ‘길 위의 실존(實存)’이라는 현학적인 명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삶은 살아가는 과정이지 살아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 : 김태완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