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2012년 6월 18일

영화에 대해 말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스포일러의 범위 때문이다. 오래 전에 차이밍량의 <하류>에 대해 모 게시판에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은 어떤 분이 노골적으로 화를 냈다.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면 어쩌냐면서 글을 당장에 지우라고 했다. 내 생각에 그 분은 평생가도 <하류>를 볼 일은 없을 분인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때문에 그런건가?

 내 경험상 '스포일러'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시기는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가 개봉된 1995년 무렵인 것 같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동네 구라빨 좋은 애들이 1시간 30분짜리 영화를 보고와서 양념쳐서 두 시간 가량을 떠들어도 그냥 듣고만 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요즘처럼 헐리우드와 동시에 개봉되는게 드물어서 동네 2본 동시 영화관에서 몇년 묵은 영화를 보거나 <명화극장>, <주말의 명화> 같은 안방극장을 이용하는게 영화관람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네 아이들의 입으로 체험하는 영화 경험도 귀한 것이었다.

<유주얼 서스펙트>가 개봉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비디오 플레이어가 가가호호 보급되어 있었고, 동네에는 담배가게보다 많은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기에 이때부터 영화 경험은 달라진다. 이제 조금만 노력만 하면 비디오 대여점에서 볼 수 있었기에 영화에 대해 미리 줄거리를 말하는게 슬슬 금지시되기 시작한 거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스포일러'라는 함구령이 내려진 것은 아무래도 위의 <유주얼 서스펙트>다. 영화 마지막에 골때리는 반전은 그때까지 나온 영화 중 역대 최고였던 것. 하지 말라는 것은 곧 해야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기에 별난 애들은 영화보려고 길게 줄을 서 있으면(당시에는 아직 멀티플랙스 영화관이 아님) 큰 소리도 "범인은 누구다~~"라고 말하고 뛰어가거나 영화 포스터에 "이 놈이 범인!"하고 표시를 해서 볼려는 사람의 김을 빼놓는 신공을 부렸다. 그 뒤 헐리우드에서는 영화 끝부분에 이만기가 씨름판에서 하는 뒤짚기보다 더 극적인 영화들을 연신 내놓기 시작했다. <식스센스>, <디 아더스>, <언브레이커블>, <아이덴티티>, <빌리지>, <메멘토>...  하도 이런 영화가 나오니 주인공이 살인마 같기도 하고, 귀신같기도 하고 뭐 이런 판국이 되었다.

이런 반전 영화에 주댕이를 닫아라는 것까지는 좋은데 일반 영화에까지 '스포일러 금지'라는 가혹한 판결이 내려졌다. "너 지금 줄거리 이야기하려고 그러지? 말하지마!.. 그냥 재밌어? 없어?... 볼만한지 안한지만 이야기해!" 
스포일러라는 것은 그 영화를 한번 밖에 안 볼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러 번 볼 사람이나 아예 안 볼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최근에 원작 소설을 미리 읽고 본 영화들이 있다. <노인의 나라는 없다>, <더 브레이브>. <소셜 네트워크>,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내가 사는 피부>.. 스포일러로 치면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만큼 상세한 스포일러가 있을까? 하지만 내용을 다 알고 보는 영화도 재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그 경우에 영화가 더 제대로 보인다. 영화보는 내내 집중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수고를 들었을 때, 카메라의 움직임이.. 배우의 연기가.. 절묘한 편집이 눈에 들어온다. 줄거리 하나를 미리 안다고 영화의 모든 것이 다 까발려진 것은 아닌 게다. 영화는 스토리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s) AV의 스포일러는 뭘까? 주연 여배우가 재킷 사진과 다르다는 것이다. 다운받는 시간과 수고를 들어주기에 스포일러 중에 가장 칭송받는 스포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