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1.
주인공인 이드리스 엘바는 <퍼시픽림>의 대장, <프로메테우스>의 함장으로 출연한 거구의 흑인배우. 이 드라마를 추천하며 항상 주연배우이야기를 먼저 하는데 이 사람의 연기력은 미국 평범한 블록버스터의 그저 그런 배우로 소비되기엔 너무 아깝다.

큰 키와 긴 팔 다리에서 나오는 연기 디테일들이 매우 훌륭하다. 주위의 소품을 활용하는 연기라거나, 돌발상황들을 감정표현으로 연결하는 연기 같은 것을 보고 있으면 이게 시키는대로 해서만 나오는게 아니라 상황별로 어떤 길로 가야지 전달력이 뛰어날지에 대해 몸이 유연하게 반응하고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거기에 오버스러움과 훌륭한 표현력의 딱 경계선상에서 감정표현 하고 있는 장면들을 보면 저기서 살짝만 더 올려도 보기 불편할텐데 거기서 더 안올리고 저 선에서 멈추는 것을 계속 보고 있자니 되려 신기할 지경이더라. 한국에 유사한 배우가 한명 있기는 한데 드라마 보고 다들 그 배우가 누구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고.

2.
이 드라마가 많이 빚지는 부분이 있다면 그 것은 장소인 런던.
내가 가본 적이 없는 동네이지만 런던에 대해 생각해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안개'다. 영화 <만추>에서 시애틀을 보고 있으면 계속 떠오르는게 안개 자욱한 도시풍경이 주는 우울함이었는데 루터도 그 런던의 안개가 주는 우울함이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다. 공간이 주는 우울함을 보고 있다면 왜 이 곳이 셜록홈즈의 고향이고, 잭 더 리퍼 같은 연쇄 살인마가 어떻게 튀어나왔는지까지 심정적으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달까.

촬영을 런던에서 했는지 다른 곳에서 했는지 정확히 알길은 없지만, 저 드라마 전체의 풍경을 지배하는 안개만큼은 이 드라마의 정서를 만들어내는데에 제일 크게 작용하는 요소일듯. 어쩌면 BBC드라마들 특유의 이미지(?)때문에 이런 묘한 결과물이 나왔을지도 모르고.

3.
주인공인 존 루터의 캐릭터는 <인썸니아>의 알파치노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다. 증거가 없는 범죄자를 잡기위해 증거조작을 하고 내사과에 계속되는 추긍을 받던 그 인물의 긴 드라마 버전이랄까. 대신 거기서 혼란스러워하며 불면증에 빠지는 인썸니아의 월 도머와는 달리 존 루터는 혼란스러움이 없다. 너무 당당하게 살인현장 증거를 조작해대는 모습에서는 묘한 쾌감까지 느껴지게 하는데, 그의 머리속에는 단 하나의 명제,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며 미적대고 있는 동안에 사람들은 계속 죽어가고, 더 죽어가게 될 것이다."

만이 존재한다. 전혀 PC(정치적 올바름) 하지 않은 그의 삶에서는 <더티하리>가 겹쳐지기도 하는데 <더티하리>가 경찰들의 스쳐지나가는 짧은 대사로 PC하지 않음에 대해 면죄부를 줬다면,

" 그 친구가 왜 더티하리인줄 알아요? 그건 남들 안하려는 지저분한 일을 혼자 하고 다녀서에요, 범인들을 지저분하게 잡아서가 아니라."

존 루터의 면죄부는 그의 그런 행동들로부터 기인한 가정 파탄과 주위 많은 사람들의 고통, 계속해서 꼬여만 가는 피폐한 삶으로 표현한다. 악당들을 잡으면 잡을수록 그의 삶은 점점 망가져 가는 걸로 두 가치를 교환해준달까.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이야기 구주인데 말이지. 인류를 구원하러 온 성스러운 이들이 결국에 인류의 죄와 맞바꾸어 자신이 망가지는 메시아 이야기 구조와.

4.
매 에피소드마다 바뀌는 연쇄살인범들을 보는 재미도 훌륭한편. 어디서 봐봄직한 범죄자들이 계속 나오지만 그들을 처음 등장시킬때에 주는 스트레이트들은 후대에 길이 인용될만한 방식일듯. 특히 시즌1 에피소드2의 인물등장은 단순한 쇼트 배열로 얼마나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될듯하더라.

아내의 사랑을 되찾길 원하는 변태 성욕자, 아버지에 대한 컴플렉스로 도시를 향해 테러를 하는 전직군인등으로 시작된 연쇄살인에 대한 이야기가 시즌1 말미에 가서는 묘한 질문을 던지더라. 위의 두 사례처럼 대놓고 연쇄살인범같은 캐릭터가 아닌 사소한 실수때문에 자기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수 없이 연쇄살인범이 되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데 곰씹어 볼수록 생각의 꺼리가 많아지더라.

5.
내가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란거 잘 알지만 아무 것도 못하는 머리가 되버려서 결국 <루터>까지 정주행. 아마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에 이어 두번째로 다 본 영국드라마가 되겠다. <셜록>은 볼때마다 잠들어서 결국 도장깨기 실패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