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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상 영화제에 열다섯개의 상을 가져가서 밸이 꼴려하는 말이 아닙니다. <광해>는 영화의 스타일 면에서는 뛰어난 것은 인정합니다.
카메라 움직임, 공들인 의상과 미술, 편집 타이밍, 잘 짜여진 내러티브,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들도 수준급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획단계부터 12월에 있을 대선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하선이라는 인물이 권력 다툼의 과정 속에서 보름 동안 광해군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민중의 열망을 대변하는 정치를 훌륭하게 해낸다는 이야기. 대단히 매력적인 이야기일 수 있으나 이것은 그저 보름 동안의 판타지에 불과합니다. 역사물 영화를 다룰 때 종종 위험한 것이 오늘날의 상상으로 사실을 윤색해서 상상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장진의 <웰컴 투 동막골>을 생각해봅시다. 일제 강점기를 겨우 벗어난 1950년대 동막골과 같이 풍요롭고 밤에는 호박등불이 꺼지지 않는 마을은 한반도에 없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지어낸 판타지에 불과합니다. 그 판타지 속에서 남북의 화해는 수류탄이 던져진 광에서 옥수수가 팝콘으로 변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입니다. 이런 스토리가 낭만적인 감동을 만들어낼지는 몰라도 여전히 분단 상황에 놓여있는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광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짜 광해인 하선이 펼치는 정책이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는 현재의 부유세 문제, 안보의 자주화와 같은 것으로 쉽게 연상이 갑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영화 <광해>에서 노무현 전대통령의 모습을 봤다고들 합니다(문재인 후보가 대표적).  그런데 이 영화는 천만 관객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 관객에는 우리가 조롱하듯이 부르는 보수꼴통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누가 보였을까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읽었을 겁니다. 영화 <광해>에서 가짜 광해 하선이 펼치는 정책은 그저 상식적인 차원이기에 박정희를 붙여도, 김대중을 붙여도, 노무현을 붙여도 다 어울립니다. 각자의 정치적 안목으로 <광해>를 해석하게끔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죠. 그래서 천만 관객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전근대의 왕을 오늘날의 대통령에 투영했을 때의 모순은 영웅(=인물)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박정희가 우리를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해주었다'다는 사고 방식은 철저히 전근대적 사고방식입니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예로 든다면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국민의 정치(of the people)에서 위정자들이 민을 위한 정치만 있는 것이 전근대의 정치입니다. 즉 철저히 지배층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for the people만 존재합니다. 국민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정치가 아니라는 거죠. 영화 속의 복잡한 문제들이 인물만(그것도 왕 하나만) 바뀌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는 대선을 앞 둔 우리들에게 거짓 환상을 불어넣기에 족합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쉽게 통할 때 그건 영화도 망가지는 것이고 현실 정치도 망가지는게 아닐까요?

보는 분에 따라 입장이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영화 <광해>가 스타일면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판타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껄끄럽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