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 호남인 사람의 잡설
- 작성일
- 16-04-17 05:14
제 본가는 전북 김제입니다. 외가는 전북 부안
아버지는 젊었을 때 작은 공장을 했다고 들었는데 사기를 당해서 쫄딱 망했다고 하네요(그 사기꾼은 목사였다고...)
아무튼 전 2살 때 엄마 등에 엎혀서 경기도로 올라왔습니다.
어렸을 때는 지지리 가난했고 아버지는 이미 젋었을 때부터 사장님 소리 듣다가
남 밑에서는 일 못하겠는지 무슨 공사를 맡아서 한다고 맨날 잘 안되서 빚만 지고 살았습니다.
집에 툭하면 빚쟁이들이 찾아오고 돈도 안되는 세간살이에 차압딱지가 붙은 적도 있고
그래서 지금도 1, 2만원 잠깐 현금이 필요한 거 아니면 절대 돈 남한테 안 빌립니다.
방학 때면 본가나 외가에 오랫동안 가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소한 밀가루 수제비 물리도록 먹거나
밥 굶는 일은 없어서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외가에서 자다가 잠결에 이모부 한명이 울분에 찬 목소리로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얘네들이 커서 전라민국을 세워야 한다" 는 식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몰랐는데 머리 굵어지면서 알게 되더군요. 호남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마타도어
마치 범죄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는듯한 표현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구조적인 문제로 거의 빈 손으로 올라오다시피한 호남 사람들이 수도권에 많고 그 중에 나쁜 유혹에
빠진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일부를 통해 다수를 규정하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그래도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크게 그런 편견에 대면한 편은 아닙니다. 물론 사투리를 전혀 쓰지 못하고
사는 곳도 경기도니 호남 출신인 게 전혀 티도 안 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사는 곳이 아닌 고향까지
물어보는 건 어느 정도 가까워진 사이 아니면 잘 안 나오는 질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 정도 출신 지역에 대한 정체성이 확립될쯤 92년 대선이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교회 장로이고 김영삼이 김대중에 비해 밑에 사람들에게 의리가 있다는 식으로 김영삼에게 투표할 것을
드러냈지만 전 투표권도 없는 주제에 그런 게 대통령 뽑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대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맞지는 않았고 대충 넘어갔었던 가 같네요)
그리고 92년 대선 개표 방송을 보다가 잠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보니 김영삼이 이겼더군요. 웬지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학교도 갈 생각도 안하고 그러고 있다가 혼나고 학교에 갔는데 고향이 영남 출신인 놈 하나가
대통령 선거 이겼다고 깐죽거리더군요. (그 색히와 제가 서로 출신 지역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기억은 안 나네요)
주탱이를 한대 날려주고 싶었지만 전 반에서 제일 작은 축이었고 집은 가난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가 거의
없고 괴롭히는 놈들도 있던 요즘으로 치면 왕따였습니다. 그저 속으로 분을 삭혔었던...
아무튼 그렇게 세월이 지나가고 군대 갈 때쯤 어머니하고 이모는 자식들 호적을 바꿔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군대 가면 호남 출신을 더 괴롭힌다고...
군대에서 고향 문제로 별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눈 문제로 소대를 바꿨는데(전차 포수에서 정비병으로)
개차반인 부산 출신 고참 하나가 있었는데 나중에 신병이 들어오자 자기 고향 맞춰보라고 하는데 신병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고참 놈이 내가 전라도 깽깽이로 보이냐~면서 신병한테
지랄지랄할 때 야전삽으로 면상을 뭉개버리고 싶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 인간 때문에 영남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훈련소에서 가장 멋진 놈이라고 생각했던
동기은 부산출신이었고 자대 와서 가장 악명 높았던 놈은(저 전입 후 얼마 안 가서 제대) 목포 출신
소대 다른 개색히 하나는 안양 출신이었고 중대에서 가장 착하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한달 정도 후임인
대구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군대 입대한 그 해에 외환위기가 왔고 그 코딱지만한 월급이 깍였고 겨울에 온수를 안 틀어줬습니다.
나중에 일주일에 한번이나 틀어줬던가?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전 주저없이 김대중에게
투표했고 결국 사수 끝에 대통령이 된...(아버지는 저 스물 살 때 돌아가셨는데 만약 살아 계셨으면 1997년에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 김대중, 이회창 둘다 천주교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김대중에게 했을런지)
제대하고 나니 국민컴퓨터라고 하면서 컴퓨터 가격은 대폭 다운시켜서 보급시키고 초고속 인터넷망을 확산시키는
상황에서 군대 가기 전에는 꿈도 못 꿨던 컴퓨터를 가져볼 수 있게 됐습니다. (제대하고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구입)
그러다 딴지일보를 알게 됐고 정치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맞아서 재밌게 봤었고
(최초로 정치적 성향이 구체화된 건 시골 갔다가 수필집인 줄 알고 본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서부터였다고 해야
할려나..)
나중에 2002년 대선 전 대통령 후보 인터뷰에서 노무현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영남에서 호남빨갱이당 소리 듣는 민주당 간판으로 부딪히고 부딪힌 사람이 있었구나
그 후로 열혈팬이 되서 노사모 가입하고 노하우에서 한동안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인 서프라이즈에서도 꽤 오랬동안 지냈고 -_-...
그리고 2002년 민주다 경선이 시작되고 경선 투표를 신청했지만 떨어졌고 그냥 마음으로만 응원을 열심히 했습니다.
울산에서부터 1위가 됐고 광주에서 1위가 되면서 대세가 됐고 마치 제 일마냥 기뻐하면 한동안 지냈습니다.
그렇게 결국 이인제를 이기고 대선후보가 됐는데 김영삼을 찾아가면서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대폭 지지율이 하락하고 후단협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김민석이 탈당하고 정몽준에게 간 날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희망돼지 저금통이 폭발하더군요. 저도 그 때 소액이나마 후원했었던
결국 그걸 기점으로 지지율을 회복하면서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를 시도했고 노무현이 후보로 확정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대선 전날 정몽준의 지지 철회
그 다음날 전화와 문자를 얼마나 돌렸었는지...그리고 6시 이후 투표율이 80%가 안된다는 사실에 거의 절망할 뻔하다가
개표 방송을 보는데 처음에는 지고 있다가 나중에 역전하더군요. 그 날 밤에 관련 방송 보다가 새벽에 잠들었습니다.
그렇게 대통령이 됐는데 제 바램과는 별로 안 맞는 방향으로 가더군요. 이라크 파병까지는 뭐 그렇다치더라도
좌회전 깜박이 켜고 우회전 했다는 말처럼 점점 실망하게 되더 터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중립을 어겼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게 됐고 그 날 점심에 방송을 보다가 숟가락을 식탁에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대학생 때 잠깐
학생들 전체가 반강제적으로 참여했던 걸 빼고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리고 탄핵의 반대 여파로 열린우리당이 사실상 처음으로 총선에게 이겼지만 오합지졸들이 모인 당이라 금새
개판이 되고 그 후에 부동산원가공개문제나 FTA, 사학법 로스쿨 바꾸기 등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정치인 팬 따위는
안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2007년 투표는 문국현에게 했고 그 다음해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한 진보신당에 처음으로
진성당원으로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총선에서 단 한석도 얻지 못하고 결국 나중에 다시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는
통합진보당으로 가고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 상태에서 2012년 총선 이후 진보신당 해산
그 후에 사회당과 합당해서 노동당이 됐지만 전 아직 당원으로 가입한 정당이 없는 상태인...
그리고 2012년 대선 전 안철수와 문재인이 떠올랐지만 둘다 딱히 맘에 들지는 않았고 안철수는 그냥 정치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적이면서 일반 시민들의 냉소적인 시각 수준으로 정치를 해석하더군요. 정치 개혁이라고 내놓는 생각들이
참 우습던... 결국 단일화가 아닌 사퇴로 문재인이 대통령 후보가 됐고 2012년 대선에서 패배
그냥 김순자 후보에게 소신껏 투표를 했어야 했나는 생각도 들었고 정치적으로 그냥 멍 때리던 시기가 꽤 있었고
그나마 그런 와중에도 한가지 남아 있던 건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라고 할까나..
최선은 아니더라도 내 고향은 차선의 선택은 한다고 믿어왔었는데 이번 총선 이후에 마음에 금이 가버린듯한
뭐 사실 호남이라고 항상 대의를 위해서만 투표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필 그게 왜 국민의당같은 새정치를
외치면서 온갖 구태는 다 저지르는 정당이냐는 건데 그나마 심정적으로 이해를 해보자면
노무현 정권 시절 문재인의 지방선거를 앞둔 부산정권 발언이나 노무현의 '호남이 내가 좋아서 뽑아줬겠나, 이회창이 싫어서 뽑았지'
라는 발언이나 대북특검으로 인해 호남의 리더였던 김대중에게 생채기를 낸 것 등이 호남에 사는 분들 마음에 앙금으로 남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보지만 뭐 정확한 건 무늬만 고향이 호남이지 외지인인 제가 알 수가 없을듯하고
다만 잘난 것도 없고 잘 살지도 못하지만 자랑스러운 고향이면서 안스러운 고향에 대한 마음의 빚 같은 게 희미해져버린 거 같은
게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일요일 새벽에 잠도 안와서 주저리주저리 잡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