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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숙제하는 기분으로 두 영화를 같은 날에 봤습니다.

김병우 감독의 <더 테러 라이브>는 소문대로 무지막지하게 밀고 나가는 영화입니다. 급박한 사건의 전개와 공간을 휘젖는 카메라, 속도 넘치는 편집이 잘 어우러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여과없이 직설적으로 퍼붓습니다. 하정우가 맡은 윤영화라는 인물은 그런 문제를 몸으로 직접 느끼는 인물입니다. 그는 최근에 아내와 갈라섰으며, 텔레비젼 앵커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좌천된 인물입니다. 이전의 지위로 다시 올라가려고 시시탐탐하던 중에 그에게 기회가 오게되는 것입니다. 윤영화라는 인물에 우리 사회 문제를 함축적으로 집어 넣다보니까 때로 영화는 서사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기우뚱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마포대교 테러 문제와 윤영화의 개인적 비리 문제는 별개의 문제인데 억지로 엮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조준해서 우악스럽 흔들어 놓기에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얼마나 많은 것을 다루냐면 심지어 '내 귀에 도청기' 사건이 생각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몰고가는 능력에 비해 개연성이나 무게감이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테러범의 요구 사항이나 범행동기가 너무나 단선적이라는 느낌을 주거던요. 각종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해서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좋은 영화는 그것을 가지고 감독 특유의 세계관을 보여줘야 합니다.

제게는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그런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속도에 휘말려 우리의 생각할 거리를 빼앗기지 않습니다. 차별적 사회 계층에 대한 문제와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제, 기계화 된 사회에서 도구화된 인간성의 문제를 읽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다만 이 영화에 대한 불만은 봉준호가 훨씬 더 영화를 기괴하게 비틀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15세 관람가에 맞출 때 그 수위가 높을 지 몰라도 뭔가 시작할려다 적당히 타협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각 열차칸마다 더 개성있는 장면이 연출되었을거라면 좋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거던요.
아울러 이 영화는 봉준호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가 될 것입니다.  제가 맨 처음 본 봉준호의 영화는 <플란다스의 개>가 아니라 <살인의 추억>이었습니다. <살인의 추억>을 봤을 때, 제 느낌은 이 영화는 범인을 잡는게 아니라 범인을 만들게 된 체제와 그 체제에 갇힌 형사들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플란다스의 개>를 봤지요. 이 영화는 아파트의 층간소음을 둘러 싸고 소음의 원인이 되는 개를 죽이려는 사람과 그 개를 구하려는 사람의 이야기죠. 그런데 재미난 점은 <플란다스의 개>는 계층간의 차이를 지하실부터 아파트 꼭대기까지 수직적으로 세워 놓았다면 <설국열차>는 꼬리칸부터 머리칸까지 그 체제를 눕힌 구조입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체제와의 싸움에 있습니다.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에서 주인공 이성재는 결국 그 체제에 순응해서 개보다 못한 인간이 됩니다.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에 교수가 된 이성재가 강의실에 슬라이드를 틀기 위해 검은 커텐을 치면서 슬슬한 표정을 짓습니다. 체제 안에 죽어가는 자의 모습이랄까요? 이에 비해 배두나는 푸른 녹지대를 거닐죠. 그리고 그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건 체제 밖에 벗어난 자의 모습입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 장면은 <설국열차>에서 엔딩과도 유사합니다.    

<설국열차>에서 고아성이 맡은 역을 '요나'입니다. 성경에서 고래의 뱃 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인물이죠. 그러니까 설국열차는 노아의 방주이면서 고래의 뱃속입니다. 앞의 이야기와 연관시키면 그 고래는 체제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질 수 있을 겁니다. 봉준호의 영화 세계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고래 뱃속에서 죽은 자의 이야기와 뱃속에서 살아난 자의 이야기. 앞의 부류에 들어가는 영화가 <살인의 추억>, <마더>입니다. 주인공들의 의지를 집어 삼켜버리는 운명과도 같은 체제를 다룬 영화죠. 후자에 속하는 것이 <괴물>과 <설국열차>입니다. 두 영화에 공교롭게도 고아성이 다 출연하지요.
<설국열차>의 영어 제목은 snowpiercer입니다. 이 제목은 '눈을  뚫고 달리는 기차'를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벽을 부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남궁민수 역을 맡은 송강호의 대사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열차의 문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게 하두 오래 닫혀있으니깐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 나는 저 문을 열고 싶어!" 체제라는 얼어 붙은 벽, 그 벽에 구멍을 뚫는 것. 이 영화의 포인트는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의 영화의 출발점 <플란다스의 개>는 어디에 속할까요? 이 영화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성재를 통해 체제 속에 죽은 자를 배두나를 통해서 거기서 살아남은 자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러니깐 거기서부터 봉준호의 영화 세계가 두 갈래로 나누어졌던 것이 아닐까요?

p.s) 오랜 만에 영화 글을 쓰니 조금 횡설수설했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너그러이 봐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