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25, 6년 전 고향에서 병역의 의무를 지고 있을 때의 일이다. 매주 수요일은 전투체력의 날이라 하여, 오전 업무가 끝나고 오후에는 전 부대원이 소대별로 편을 갈라 축구를 하거나 족구라고 하는 공놀이를 하였다. 훈련을 받지 않고 뛰어노는 일이니 나름대로 신이 나서 경기를 하였다. 물론 경기가 끝나고 난 뒤, 진 편에서는 고참들로부터 군기를 잡히기도 하였지만 PX에서 음료수에 과자에 군것질거리로 즐길 수 있어서 사병들에게 수요일은 이래저래 홀가분한 날이었다. 가끔은 공놀이를 교육관에 모여 정신훈련을 위한 영화 보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역시 공놀이를 하지 않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프로젝션 TV로 보았는데 화면이 어둡고 흐리며, 군대생활은 훈련을 받는 것 이외에는 정신교육이나 안보강연 같은 것이 당최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라, 그리고 조금이라도 엉덩이를 바닥에 붙일 여유가 생기면 졸게 마련인지라 내용이 거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그 영화의 내용은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중국 청 왕조의 마지막 시기를 그린 것이어서 온갖 정변과 혼란과 부정과 부패와 무질서와 협잡과 음모가 매 장면마다 이어졌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영상은 서태후 일당이,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지적하는 양식 있는 지식인들을 역모로 몰아 처단하는 장면이었다. 죄수를 호송하는 수레인 함거(檻車)에 목만 내민 채 온몸이 결박당한 양심적 지식인들이, 청 왕조로서는 진정한 충신인 지사들이 끌려가면서 서태후와 그 일당의 전횡을 피를 토하는 소리로 폭로하였다. 자기들의 비행을 지적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서태후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이들의 입을 막으라고 명을 내렸다. 일언지하에 병졸이 달려가서 작은 나무토막을 이들의 입에 끼워서 말도 못하게 하였다. 말조차 할 수 없게 된 죄수들은 꽁꽁 묶인 몸을 버둥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을 내뱉으며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내게는 말마저 막혀버려 몸뚱이를 버둥거리며 죽음으로 가는 양심적 지식인들보다 그들의 웅얼거림조차 가슴을 후벼 파는 비수처럼 들린 서태후가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뒤로 이 장면은 내내 뇌리에 남아서 언론과 관련한 사회현실이 문제가 될 때마다 또렷이 떠오른다.

  

  조광조가 올린 이 상소와 관련한 사건의 전말은 대체로 이러하다. 중종 10년(1515) 8월에 담양 부사 박상, 순창 군수 김정 등이 반정 이후 폐위된 왕후 신씨를 복위시키자고 상소하였다. 원래 폐비 신씨는 반정에 동조하지 않았던 연산군의 충신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군신의 의리를 내세우다 반정을 주도한 세력에 의해 일차로 제거되었다. 그리고 신씨는 반정이 일어난 뒤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신수근의 딸이라 하여 폐위되었다. 반정공신의 의식 속에는 폐비가 죽은 아비를 위해 정치적 보복을 하리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죽자 10년 뒤 다시 박상, 김정 등의 발의로 신씨 복위 문제가 불거졌다.

  김정, 박상 등은 조광조 일파이다. 이들이 신씨 복위 문제를 거론한 데는 나름의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었다 하겠다. 원래 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실은 연산군 때 실권을 지녔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반정은 조선 사회의 혁신을 위해 도태되어야 할 대상이 도리어 혁신을 주도했다는 내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반정 원로 세 사람은 죽었지만, 이들이 구축한 기득권의 세력은 여전히 사회모순을 재생산하고 있었기에 혁신을 위해서는 이들의 반정 주도 명분을 약화할 필요가 있었다. 신씨는 폐위되어야 할 결정적인 흠이 없었고 왕비로 책봉된 상황에서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한 반정 주도 세력에 의해 폐위된 만큼 폐위의 뚜렷한 명분이 없었으니 신씨의 복위를 발의한 이면에는 중종 반정의 의의를 재성찰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려는 사림의 의지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발의는 이미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가 있고, 또 10년이나 지난 일이어서 사림에서조차 의견이 분분하였다. 결국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박상과 김정을 탄핵하여 두 사람은 유배를 당하였다. 그 뒤로도 정광필, 안당, 이장곤 등 원로 중진의 중재로 사면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다가 1년이 지난 중종 11년 11월에 가서야 두 사람은 서용되었다. 조광조의 이 상소는 10년 11월 22일에 올린 것이다. 조광조의 의도는 상소의 내용이 지나치다 하더라도 여론의 소통을 위해 발언 내용을 빌미로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말을 하는 동물이다. 물론 짐승들도, 새들도 자기 의사를 울음으로 표현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의사소통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삶을 살아가는 힘이다. 새들의 사회에서도 사투리가 있다고 한다. 이런 점은 새들조차도 주체적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의식이 발달하고 삶의 양태가 복잡한 사람의 세계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은 언어, 곧 말이다. 그러므로 무슨 말이든 자유로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천부인권(天賦人權)을 지닌, 민주 시민사회의 주체임을 보증하는 보루이다. 위정자나 권력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라 하여 말을 막는다는 것은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옳지 않은 말, 사리에 어긋나는 말, 부당한 말, 사회를 혼란시키는 말이라도 시민사회에서는 건전한 의식을 가진 주체적 시민에 의해 그런 말들이 저절로 걸러져야지 권력이 개입하여 말을 막아서는 안 된다.

  하물며 사회의 누적된 모순을 지적하고 권력의 부패해 가는 현상을 고발하는 일은 양심과 양식을 갖춘 지식인이라면, 아니 지식인이 아니라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런 말은 듣기에는 불쾌할지 몰라도 오히려 자기의 권력을 튼튼히 지켜주는 말이다. 비판과 충고를 들어야만 모순을 볼 수 있고, 모순을 보아서 해결해야만 자기 권력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경』에서도 “하늘은 우리 인민이 보는 것을 통해 보고, 하늘은 우리 인민이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고 하였다.

  “다리 밑에서 원님 욕하기”라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상감 욕도 한다.”는 속담이 있다. 말문이 막혀버리면 민초는 쌓이고 억눌린 울분을 욕으로라도 털어놓게 마련이다. 양반지배 향촌사회에서도 양반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욕할 수 있는 숨통을 터주었다. 그런데 항차 민주 시민사회에서 이 사회의 주체인 민주시민의 입을 막고 있다. 말을 하는 일이 본분인 지식인들에게 말로 죄를 주는 사회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귀를 닫는다고 듣기 싫은 말이 들리지 않는가? 눈을 감는다고 보기 싫은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귀를 닫으면 내면의 귀에 더 큰 울림이 들린다. 눈을 감으면 내면의 눈에 더 또렷한 진상이 보인다. 입을 막는다고 말을 못하는가? 입을 막아버리면 몸뚱이로 말한다.

  

  

김태완 글쓴이 : 김태완

(사)지혜학교 철학교육연구소 소장

주요저서

-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소나무, 2004

- 『중국철학우화393』 소나무, 2007

- 『율곡문답, 조선 최고 지식인의 17가지 질문』, 역사비평사, 2008

- 『경연, 왕의 공부』, 역사비평사, 2011

- 『맹자, 살기 좋은 세상을 향한 꿈』, 아이세움, 2012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