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 지젝의 공산주의 정치학에 대하여(이진경)
- 작성일
- 14-05-24 20:07
마르크스주의연구 33호에 실린 이진경의 글을 발췌해 봤습니다. (약간의 저의 코멘트도 포함해서)
지젝의 공산주의 정치이론에 대한 논문입니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이나 정치론 그리고 그의 '공산주의 가설'이 무엇인지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조해보실만한 글이라 생각해서 올려봅니다. 이 논문은 주로 지젝과 관련된 내용입니다만 같이 실린 서용순의 글은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을 다루고 있고 박도영의 글은 지젝과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을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개념으로 비판하는 글입니다. 나머지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시면 되겠네요.
실재의 정치학과 배제된 자들의 공산주의
지젝의 공산주의 정치학에 대하여
1. 공산주의의 부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공산주의는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에서 시작되어 2011년 그리스로 번져간 유럽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종말이 도래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이 '공산주의'의 부활을 기도하는 것은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바디우와 지젝은 공산주의를 하나의 가설로서 제시하는 데 이 '공산주의 가설'은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평등성의 공리, 둘째는 억압국가의 불필요성, 셋째는 지식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을 넘어선 노동의 조직화.
그렇다면 이들은 우리가 익히 잘아는 그런 공산주의를 불러내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가설'이라는 말은 저 몇개의 공리에 잠정성을 부여하려는 것이고 지금까지의 역사적 경험과 현재 자본주의의 새로운 양상에 부합하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상을 구성하자는 제안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젝의 '공산주의 가설'을 검토하려면 후기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데올로기나 정치, 혹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을 경유해야 한다.
2. 이데올로기와 환상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허위의식'으로 정의된 이데올로기 개념을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에 대한 이론으로 재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호명'에 답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호명된 기표에 대한 상징적 동일시와 호명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상상적 동일시의 교착을 통해 작동하는 이 개념은 라캉의 '도식 L'과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이데올로기 개념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호명 간의 연관을 전혀 사유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고 그로인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통해 제시되는 것이 어떻게 내면화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매혹하는 이유, 포섭하는 이유도 드러나지 않는다. 호명에 답하는 이유 없이 호명은 작동한다고 가정되며, 응답하지 않고 벗어날 여지도 없어 보인다.
지젝은 이데올로기 개념을 라캉의 실재개념과 짝을 이루는 환상이란 개념을 통해 제시했다. 라캉에게 환상은 엄마나 아빠 혹은 큰타자가 원하는 것에 대한 질문(원하는게 뭐지 Che vuoi?)을 통해 얻는 대상에 대한 동일시를 뜻하는데 이는 욕망의 근본적 결여를 뜻하는 실재를 은폐하고 아이의 현실을 구성하고 아이의 동일성을 구성한다. 이 동일시는 불완전한 것이기에 대상과 주체 사이의 구멍을 포함하지만 환상은 고통스러운 결여를 은폐하며 현실을 봉합하는 기능을 한다. 환상이란 욕망의 실재를, 그 근본적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선택된다.
환상이란 현실의 세계가 비추어지는 스크린, 근원적 결여를 가리는 스크린이고, 현실은 그 환상의 스크린 위에 투영된 세계다. 이데올로기란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환상의 스크린 위에 투영된 현실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 자신의 불가능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설정된 전체성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실재나 근본적 결여에 대한 무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구축한 꿈같은 환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본적인 차원에서 현실 자체의 토대로서 구성하는 환상-구성물이다"
환상은 현실의 스크린이다. 환상 뒤의 실재만큼이나 환상 자체는 접근할 수 없는 실재에 가깝다. 이데올로기의 영상이 사라진 스크린 자체가 이미 불모의 사막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데올로기로, 현실로 도피한다.
이데올로기는 환상의 스크린 위에 직조된 큰 타자의 담론이며 결코 채워질수 없는 결여를 제거할수 없는 전체이고 분열된 전체이다. 큰 타자의 작동을 보장하는 또다른 큰 타자는 없다. 그렇기에 호명은 번번히 실패한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깊은 내면에서는 진지하게 믿지 않는 그래서 호명을 걸핏하면 벗어나는 사람과 같은 경우를 들 수있다. 근본에서는 믿지 않지만 믿는 척하며 호명에 종종 대답하며 그런 동일시를 통해 자기 욕망에 길을 내주는 그런 타협과 같은 것이다.
'주체'는 알튀세의 말처럼 단순한 '신민'을 뜻하지 않는다. 주체는 분열로 말미암아 큰 타자로부터 이탈할 수있다. 결여로서의 실재, 그로 말미암은 구멍난 동일시와 분열된 큰 타자 등이 주체성의 고유한 자리를 제공한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은 분열을 통해서 작동한다. 그런데 이 분열이 이데올로기의 '봉하된 전체'를 뚫고 나가려면 실재의 차원이 개입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 개념이 그 한 예이다. 죽음충동이란 쾌락원칙이나 현실원칙을 통해 추구되는 현실적 욕망의 방향과는 반대로 그 현실세계에 몰입하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맹목적 충동이다. 고통과 마주하며 현실의 제약을 넘어 반복해서 나아가려는 이런 충동적 힘을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재정의한다.
실재의 차원에 속하는 주이상스는 현실적 쾌락의 유혹과는 반대로 반복적 고토을 추구하며 현실의 차원을 찢고 균열과 간극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과도함을 수반하기에 이 충동은 '초과'나 '잉여'와 결부된다. 모든 주이상스는 언제난 잉여의 과도함을 동반하는 잉여-주이상스다. 지배적인 것에 반하여 자신의 욕망을 밀고 나가는 정신분석의 윤리를 떠받치는 힘이 주이상스고 그 윤리를 통해 주어진 현실을 돌파하는 것이 주체이다.
혁명이란 고통에 대한 반복적이고 충동적인 힘을 통해 주어진 현실을 돌파하는 것이기에 폭력의 불가피성에 대해 강하게 고수하는 이유가 된다. "혁명에서 이 과잉을 제거하려는 경건한 욕망은 단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이다"
3. 자본주의와 비물질성
지젝에게 지금의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과잉이 원리인 사회다. 사물자체의 과잉 속이서만 지속적으로 '정상적 제약'을 벗어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에서 필연적으로 일으킨 과잉생산이 위기를 낳았ㅈ만 이를 역으로 과잉-소비라는 전략을 통해 극복하는 체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의 한계를 드러내는 초과와 과잉을 자신의 증식의 계기로 만드는 능력, 그것이 자본의 본질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불일치와 모순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본질에 포함도며 바로 그것이 "자본주의를 영원히 발전하도록 추동하는" 내적 한계요 내적모순이다.
자본주의는 이 실재적 간극을 가리는 환상으 스크린 위에 사람들이 욕망하는 대상을 펼쳐놓는다.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 없는 크림, 알코올 없는 맥주.....가상현실은 이처럼 본성이 제거된 물건을 제공하는 과정을 단지 '일반화'할 뿐이다.....가상현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로 경험된다"
맑스가 <자본>에서 제시한 물신주의란 인간 간의 관계가 상품들 간의 탈인격화된 관계로 대체된다는 개념이다. 반면 문화자본주의에서 물신주의는 비인격적인 이 물신들이 비물질화되는 양상을 취한다. 상품이 구매되는 경험의 소품이 되는 한 상품은 그 경험의 일부로 비물질화된다. 물질성의 흔적이 사라지는 이런 새로운 물신주의는 화폐가 전자적 형식으로 이행함에 따라 최고조에 이른다.
노동자체가 공공장소에서 사라지며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도 이와 관련된다. '노동계급'이 소멸된 서구와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중국, 인도등의 분할가 공생 또한 이러한 사태의 다른 표현이다. "중국은 미국자본을 위한 노동계급의 국가다"
"카페인 없는 커피"에 대한 비판은 고통스러운 실재를 제거하고 원하는 맛과 향만 즐기려는 쾌락원칙에 대한 죽음충동의 비판인것 같다. 실재없는 현실이 가능하리라는 허구를 산출하는 이런 입장은 실재로부터 현실로 도피하려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 상응한다. 폭력없는 혁명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
2008년 이후 구제금융에 대한 그의 서술은 이와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금융투기로부터 실제 인간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재화를 생산하는 '실물경제'로 회귀할 필요를 역설하는 자들은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자기추진적이며 자기 확대적인 금융순환은 자본주의에서 생산의 현실과 대조되는 유일한 실재의 차원인 것이다" 이는 앞서 문화자본주의나 가상현실에서 양자의 관계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실재고, 어떤 것이 현실일까?
(이진경은 반대라고 했으나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문화자본주의나 가상현실은 상품의 물질성이라는 현실성이 제거된 첨단의 '물신주의'를 나타내는 것이고 금융자본도 실물경제라는 물질성을 교란하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핵심이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 모두 실재의 차원으로 언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을 세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가 이윤에서 지대로 전화되는 장기적 추세다. 이는 천연자원과 공동의 지식을 사유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네그리와 하트가 '공통적인 것'의 착취방식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생태계, 물, 공기, 자연자원등과 같은 공통적인 것, 지식이나 아이디어, 언어 등과 같은 지식의 사유화가 그것이다. 전통적 사적 소유권 외에 특허권이나 저작권등과 같은 권리등을 통해 착취하는 방식이다.
둘째, 비정규직의 일반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실업이 확대되는 경향이다. 또한 생태계의 와해, 인간의 조작가능한 기계로의 유전공학적 환원, 삶에 대한 총체적 디지털 제어를 동반한다. 이는 우리를 '실체 없는 주체'로 만드는데 이런 상황은 실체성이 없는 제로포인트를 향해 종말론적 종점을 향하게 만든다. "오늘날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이며,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셋째, 전문경영인과 같은 잉여임금을 받는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이다. 각종 전문가. 행정가, 공무원, 의사, 변호사, 언론인, 지식인, 예술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최근의 반자본주의 시위가운데 봉급부르주아지가 사진의 특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위에 참가가는 경우가 늘고있다. 이집트 혁명 초기는 봉급 부르주아지의 반란으로 규정할만한 순간이 있었고 그리스의 시위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경우 봉급 부르주아들이라 할 수있는 당 간부에 의한 자본주의라고 할수있을 것이다.
5. 공산주의의 요소들
지젝에게 혁명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점점 진보해가는 운동이라기보다 끝없이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계속해서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라는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는 이유다. 바디우는 '공산주의 가설'을 제시하는 이유를 "그 가설을 포기한다면 어떤 집단행동의 차원도 행할 이유가 없고 그런 관점이나 이념이 없다면 역사나 정치의 어떤 미래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칸트적 의미의 규제적 이념이나 평등을 선험적 공리로 취하는 윤리학이라기봐 사회적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이다. 라클라우, 무페가 말한 것처럼 '적대'란 하나의 사회 안에 그것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 분열이며 라캉이 말하는 실재와 같은 것이다. 공산주의는 이런 근본적 적대의 해소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인 것이다. 공산주의가 영원하다면 이 적대가 영원하기 때문이며 불가능하다면 그로 말미암아 반복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영원한 운동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이념의 새로운 양식을 찾는 것이다.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변화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런 점에서 현재의 자본주의에는 네 가지 적대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험,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특히 유전 공학에서의)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마지막으로 새로운 월가와 빈민가 간의 적대, 즉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이 그것이다.
앞의 세가지는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공통적인 것'의 상이한 측면들이라면 네번째 것은 배제된 자를 포함된 자로부터 분리하는 계급적 간극이다. "앞의 세 문제는 인류의 생존의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네번째 문제는 정의의 문제에 해당한다."
공통재를 사유화하려는 시장메커니즘에 대항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이 필요한데 지금 공산주의 관념이 소생되어야하는 이유는 이런 '공통적인 것'들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엔클로저에 대한 투쟁을 위한 '배제된 자들'의 급진화가 요구된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을 폐기하지 말아야될 이유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들을 둘러싼 계급투쟁만으론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네번째 적대를 건드리지 않고 국가장치를 통해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지젝은 '사회주의'라고 명명한다.
공산주의가 평등주의적 집단을 지향한다면 사회주의는 위계화된 관계를 내포하는 유기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공산주의가 소유 자체의 극복을 표상한다면 사회주의는 국가적 소유(국유화)를 표상한다. 사회주의란 '보편화된 사유재산'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진정한 경쟁자,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다(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 내내 자본주의애 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었음을 기억할 때가 되었다)"
지젝이 보기에 네번째 적대, 즉 배제된 자들과 관련해서만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정당화된다.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적대는 그 전복적 효력을 상실한다. 즉, 생태학은 지속 가능한 개발의 문제로 변하고,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한다"
네번째 적대가 핵심적이라 함은 그것을 통해 다른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 아니라 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입지점이 네번째 적대라는 말이다. "공산주의는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 그것은 '시장과 국가'라는 틀의 한계를 돌파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가리키는 이름이다"(다시말해 공산주의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문제의 제기라는 뜻이다)
또한 지젝은 바디우가 '영원한 공산주의의 이념' 내지 공삱의적 '불변항'이라고 부른 것을 고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세의 천년왕국주의적 반란, 자코뱅주의, 레닌주의, 마오주의등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작동한 네가지 근본 개념으로 "엄격한 평등주의적 정의, 처벌적 테러, 정치적 주의주의, 민중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정치적 주의주의는 역사와 자유에 대한 지젝의 해석과 관련있고 처벌적 테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과 결부된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새로운 증식의 기회로 만드는 '자기혁명화'하는 질서다. 위기의 폭발과 그것의 재질서화를 반복하는 악순환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런 패턴을 따르지 않고 "세계자본주의의 무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돈(질서)의 과제를 떠맡은 혁명의 공간을 열어놓"는 일이 필요하다. '처벌적 독재'라는 말이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고자 그 적대자를 제거하는 것이 요구되는 이유는 국가를 우회해 혁명하려는 발상이나 처벌의 고통스러운 과정, 혹은 폭력이라는 실재의 침입없이 혁명하려는 것은 카페인 없는 커피나 알콜 없는 맥주처럼 핵심을 제거한 채 껍데기만 즐기려는 것이고 '혁명 없는 혁명'을 하려는 것이다.
국가와 정치에 대한 그의 공리를 두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공산주의적 국가-당 정치의 실패는 무엇보다 반국가적 정치의 실패, 국가형태를 자기 조직화의 직접적이고 비대의적인 형태(평의회)로 대체하려는 노력의 실패라는 공리. 그러나 스탈린 시기의 거대한 국가장치에서 보듯이 국가-당 정치는 결론적으로 국가장치의 확장으로 귀결되었으며 크론슈타트 봉기의 진압 이후 대중의 직접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을 해체하고 지역 단위 대표체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에서 알수있듯이 비대의적 조직형태의 무력화를 동반한 실패였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둘째, 국가를 무엇으로 대체하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이 없다면 국가에서 빠질/물러날 권리가 없다. 진정한 과제는 국가에 거리를 두는 거시 아니라 국가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도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의 탈취만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국가와 혁명>에서의 레닌의 테제의 반복. 그러나 국가장치의 '파괴'를 국가장치의 '대체'로 쉽게 바꿈으로써 국가문제를 벗어난 정치, 반국가적 정치를 처음부터 배제하고 봉쇄하는 공리는 아닐까? 레닌이 제기한 국가장치의 파괴나 소멸이 대체 무엇인지 근본에서부터 사유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특히 억압장치와 구별되는 '사물에 대한 관리'라는 관념이 권력의 작동을 전제하는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관리장치와 통치권력은 계급이 소멸된다해도 자연스럽게 소멸될수 없다는 점을 좀더 깊이 생각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를 다시 사유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이진경은 '사물에 대한 관리'나 '통치'가 아닌 정치가 어떤 경로로 가능한지 제시했어야 했다. 그는 다만 그 새로운 '정치'를 국가장치를 경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묻고있을 따름이다)
6. 실재의 정치학
지젝은 국가와 혁명의 문제에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으로 돌아가지만 그것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서 "오늘날 어느 때보다 더 레닌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경제는 핵심영역이고 전투는 이곳에서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주문을 깨야 한다. 하지만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 지젝이 '탈정치화'에 반대한다고 할 때, 탈정치란 무엇보다 우선 정치로부터 벗어난 어떤 것이 아니라, 경제로부터 벗어난 정치를 뜻한다.
한편 당 없는 운동에 대한 비판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당이라는 형식이 없다면 운동은 '저항'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그린피스나 환경운동,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운동 등 이른바 '새로운 사회운동'모두가 보편성의 차원이 결여되었다는 점에서 탈정치화된 운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지젝은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혁명 없이는 불가능한 국가전복의 정치적 길을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젝은 "제도화된 의회정치와 새로운 사회운동들 사이의 제3의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길이 정치적 운동이 되기 위해 당이라는 형식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당이라는 조직적 형식 없는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이며 정당이란 형식을 벗어난 저항은 '탈정치'의 또다른 형태일 따름이다.
지젝이 당 개념을 통해 강조하려 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개입'이라는 레닌적 의미라기보다 정신분석학을 통해 재영유된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치료란 '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는 환자의 자연발생적 태도에 반해, 그의 자연적 기질을 거슬러 개입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란 "실재로부터 도피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대중의 자연발생적 태도에 반해 현실속에 존재하는 균열을 그 현실을 초과하는 어떤 충동을 가동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어떤 정해진 해석을 제공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정신분석가도, 당도 우리의 행동에 대해 해석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형식화란 "적대의 실재에 집중"하여 통합된 전체를 이루는 요소들을 비틀고 왜곡해 문제가 되는 영역에 특정한 색을 입하는 낯선 유입물을 가동하는 것이다.
내용이 아니라 당이라는 형식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브레히트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당의 집단적인 형식 바깥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그 입장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라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당아닌 다른 운동이 이런 의미의 '형식화'를 제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제공하지 못하며 오히려 전통적 좌파들의 입장게 가깝다고 할수있다.
적대의 실재에 집중하는 정치는 바디우가 말한 '실재의 열정'과 연결된다. 바디우는 20세기의 핵심적 특징을 '실재의 열정'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이는 유토피아적 계획이나 이상, 프로젝트등에 기반한 19세기와 달리 새로운 질서를 직접적으로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물자체'를 향한 열정과 같은 것이다. 현대의 처절한 전쟁의 경험, 하드코어적 성욕, 자살테러와 같은 죽음마저 불사하는 과도한 '열정'이 그것이다. 혹은 '정화'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정치적 숙청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화와 더불어 '빼기'(감산)의 정치 또한 실재의 열정의 또다른 축이다. '배제된 자', 세어지지 않는 자'들에 대한 바디우와 랑시에르의 정치학이 그것이다. 랑시에르는 세어지지 않는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자, 몫없는 자들을 통해 '치안'과 구별되는 정치를 정의한다. 치안이 몫이 있는 자들의 몫을 관리하는 것이고 주어진 자리에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정치란 몫이 없는 자들이 몫을 주장하는 것이고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이런 이탈 내지 빠져나감을 빼기(subtraction)라고 하며 이런 청지학을 감산의 정치학, 빼기의 정치학이라 한다.
주어진 현실에 몰입하기보다 그로부터 배제되었기에 빠져나갈 수있는 정치의 개념은 현실에의 몰입을 거부하고 고통을 무릅쓰고 반복해 그 현실로부터 빠져나가는 '죽음충동' 혹은 '주이상스'와 상관적이다. 그것은 현실안의 불일치와 간극을 드러내고 확장하며 그럼으로써 큰타자의 무능을 발견하고 빠져나간다.
이러한 실재의 정치학은 라캉이 말한 '정신분석의 윤리'와 상관적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라캉은 가능한 쾌락과 고통을 비교 계산하는 것, 리비도의 투여와 쾌락을 계산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고 본다. 어떤 고통이 따르더라도 심지어 죽음마저 불사하며 할 것을 하는 것이야 말로 '윤리적'이다. 칸트적 정언명령이나 초자아의 초월적 명령은 그런 '윤리'를 요구한다. 이는 쾌락을 계산가능하다고 보는 세계라기보다 그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죽음 충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멜빌의 바틀비처럼 때로는 고통이나 몰락, 패배나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이며, 실재의 정치학이다.
이는 역사와 자유의 관념에 대한 근본적 역전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적 치료가 환자의 자연발생적 경향을 거슬러가듯 혁명이란 역사의 기차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벤야민의 말처럼 역사의 기차를 멈추는 것이다. 지배적 경향을 따라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 운동을 가로막는 것"이며 우리를 파국과 '종말'로 몰고가는 역사의 내적 추동력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필연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이다. 이를 지젝은 '순수한 주의주의'라고 정의한다. 바디우의 '정치적 주의주의'도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이해된다. 자유는 역사 안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역사로부터'의 자유이고 역사(적 필연)와의 결별이다. 이러한 자유는 창조적 실험을 위한 자유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자유를 통해서 역사의 이름으로 주어진 공산주의의 자리를 거부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새로운 기초 위에 공산주의를 재발명"하는 행위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7, 결론 혹은 질문
요약하면 지젝의 이론은 이데올로기에서 시작해서 자본주의분석, 공산주의와 실재의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논리적 동형성을 가진다. 실재와 분열, 그것을 봉합하여 가리는 환상, 그 환상의 스크린 위에 투영된 '현실', 그러한 현실에서 주체성을 가동하기 위해 실재의 차원을 환기시키는 실재의 정치학, 정신분석의 윤리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폭력등에 대한 입론도 모두 이런 맥락이다.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그자체로 '현실'이다. 현실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재로부터 도피하며 구성된 현실 그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환상이 그런 이데올로기의 바탕에 있으며, 불일치나 간극으로 암시되는 대상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대중을 유혹하여 복종을 야기한다. 혁명이란 현실에 바탕에 있는 이 간극을 적대를 통해 현실을 전복하는 것이다. 현실이 제공하는 쾌락을 거부하고 고통을 향해 반복해가는 실재적 충동, 주이상스를 밀고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폭력과 주이상스가 항상 혁명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테러리즘, 파시즘이 될 수도있다. 따라서 어떤 조건에서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주이상스가 될수있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지젝은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옹호하면서 여기에 죽음마저 무릅쓰는 주이상스의 초과적 충동을 적용하지 않은바 있다. 이는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와 대결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처벌적 테러와 폭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그의 논지를 배반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그의 주저함이 정치에 필수적인 '신중한 현실적 고려'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주이상스와 정신분석의 윤리는 다시 현실원칙의 벽을 넘지 못한자는 자인이 아닌가? 이는 주이상스의 과도한 에너지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충동의 윤리학으로는 정치를 사유할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지젝의 당과 정치, 국가와 혁명등과 관련된 생각은 생각보다 고전적이고 낯익은 것이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죽었다'는 것, 그의 해법은 실패했다는 것,......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구해낼 만한 유토피아적 불꽃이 남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레닌 안에 그 불꽃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국가장치를 통해 국가를 소멸시키겠다는 시도만큼은 큰 실패는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국가자치를 통해서만 혁명이 가능하리라는 주장은 이전의 실패는 국가장치를 새로운 민중참여 형태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면 될 것이라는 '대안'은 너무 안이한게 아닌가?
사회주의와 대비되는 공산주의의 전망속에서 무기로서의 국가가 어떤 효과를 가질것인가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로 국가장치의 공산주의적 이용방법을 요약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시도들이 레닌과 그 후계자가 실행한 바 있으며 결국 레닌의 우려대로 국가장치에 내장된 경향적 힘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음을 알고있다. 그렇기에 국가장치를 이용한 '독재'가 공산주의 아닌 '사회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수 있을까?
나는 레닌의 생각과 달리 국가는 아마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본다. 설령 계급적 억압장치로서의 기능을 멈추고 '사물에 대한 관리'로 국가기능이 치환되더라도 국가의 '억압적' 기능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푸코가 명확히 했던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통치'의 정의이고 통치적 통제장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치를 '정치'와 구별하지 못하면 '치안'과 정치를 혼동하는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부연하면 여기서 이진경은 지젝이 말하는 국가장치의 개조라는 '정치'가 사물에 대한 관리로서의 '통치'까지 바꾸진 못하기 때문에 정치의 개조만으로는 통치적 기능으로서의 국가의 성격까지 바꾸진 못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거대한 인구의 인류와 방대하게 집적된 부가 존속하는한 국가장치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기에 국가장치를 무력화하고 국가장치의 소멸을 향한 투쟁은 혁명 이후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후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시제 속에서 항상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장치가 존속하는 가운데에서 진행되는 국가의 소멸이란 어떤 것일수 있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가동될 수있는지 '좀 더 나은 실패를' 감수하며 반복해 실험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럼으로써만 갈수록 강화되고 갈수록 전면화되는 국가장치의 효과를 그나마 약화할 수 있을 것이다.
', '마르크스주의연구 33호에 실린 이진경의 글을 발췌해 봤습니다. (약간의 저의 코멘트도 포함해서)지젝의 공산주의 정치이론에 대한 논문입니다. 지젝의 이데올로…', 'http://image.aladin.co.kr/product/3847/68/cover/6000712492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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