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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의 스포츠프리즘] 타고 나간 배보다 더 큰 물고기와 며칠 밤낮을 싸우면서 산티아고 노인은 디마지오를 떠올린다. 수평선과 별만 바라보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뒤꿈치를 다치고도 맹활약한 디마지오에게 지지 말아야지.” 마침 뉴욕 양키즈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경기가 벌어지던 때였던 것이다.

조 디마지오는 1940년을 전후로 두 차례 홈런왕, 두 차례 타격왕에 올랐던 뉴욕 양키즈의 강타자다. 그가 활약하는 동안 양키즈는 아메리칸리그서 열 번, 월드시리즈서 아홉 번 우승했다.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어서 더욱 유명하다.

메이저리그 구장에 한 번 들어가 본 적도 없지만 노인에게는 디마지오가 우상이었다. 헤밍웨이 소설 속의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메이저리그의 스타들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살아있는 우상, 영웅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활약에 울고 웃으며 삶의 고달픔을 잊곤 했다.

1960년대를 주름잡던 로베르토 클레멘테, 그는 지금까지도 뭇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서민의 우상이다.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네 차례나 타격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보냈다. 1971년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며 MVP로도 뽑혔다. 그러나 이듬해 니카라과의 지진 난민들을 돕기 위해 손수 구호품을 싣고 가다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 서민의 영웅들은 지금 미국의 스프링필드 쿠퍼스타운의 야구 명예의 전당에 전설로 살아있다.

지난달에는 1977년부터 21시즌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던 안드레 도슨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140년이 되어가는 메이저리그 역사의 수많은 별 가운데서 203번째로 얻은 영예다.

‘도슨이 누구야?’ 젊은 야구팬들 가운데서는 배리 본즈,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명성은 알아도 도슨을 기억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1976년부터 1996년까지 뛰는 동안 도슨은 438 홈런, 2,774 안타, 1,591 타점, 314 도루를 기록했다. 8차례 올스타 게임에도 참가했다. 사실 얼마 전 은퇴한 본즈나 아직도 진행형인 현역 스타 로드리게스의 기록에 비하면 대수롭지도 않은 편이다.

그러나 도슨은 본즈나 로드리게스와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달랐던 또 한 사람의 야구 영웅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가장 미약한 전력의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데뷔해 신인왕이 되었고, 1987년 시카고 컵스에서 내셔널리그 MVP가 되었다. 무엇보다 열두 차례의 무릎수술을 받으면서도 몬트리올에서 11년, 시카고에서 10년간 메이저리거로 활약했다. 성실과 끈기의 선수답게 명예의 전당에도 9번의 심사 끝에 통과했다. 56세에 명예의 전당에 오른 그를 위해 두 팀의 팬들이 쿠퍼스타운에 모여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날 연설이 의미심장했다. “명예로운 이 팀에 루키로 받아준 데 대해 감사한다. 나는 명예의 전당을 마음에 두고 플레이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선수들도 야구의 명예를 사랑한다면,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새겨듣는다면 나처럼 이런 명예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연설은 지금 곤혹 속에 빠져 있는 메이저리그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1976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흑인 강타자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의 생애통산 최다홈런 714개의 기록을 돌파할 무렵 그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백인들이 자신들의 우상 루스의 기록이 깨어지는 걸 참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론은 755개의 새 기록을 달성, 무려 30년 동안이나 빛나는 개인통산 최다홈런 기록을 지켜왔다.

2007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배리 본즈가 아론의 기록에 육박하면서 메이저리그와 팬들 사이에 새로운 논란이 벌어졌다. 본즈의 근육강화제 복용 소문 때문이었다. 약물에 힘입은 기록을 어떻게 인정하느냐는 게 논란의 핵심이었다.

8월 7일 756개의 마침내 새 기록을 달성하던 날 본즈는 아론으로부터는 축하 메시지를 받았지만 이후 내내 논란에 휩싸였고 서둘러 메이저리그에서 퇴장했다. 약물 복용을 부인해온 본즈 자신이 연방대배심에서 “스테로이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약을 복용했다”고 시인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무서운 기세로 기록을 쌓아가는 뉴욕 양키즈의 강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메이저리그의 새 희망처럼 느껴졌다. 그의 깨끗한 방망이로 약물에 얼룩진 배리 본즈의 최다홈런 기록 762개를 깨뜨려 주었으면 하는 게 MLB 관계자는 물론 야구팬들의 바람이었다.

로드리게스는 한 달 동안에만 14개, 한 시즌에만 50개 이상의 홈런을 날리며 메이저리그 역대 최연소로 개인통산 500홈런을 돌파했다. 그래서 본즈의 기록을 능가할 가장 확실한 후보로 꼽혔다. 그러던 로드리게스도 지난해 2월 금지약물 복용 사실을 털어놓았다. 경기에 대한 압박감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개막하자마자 발칵 뒤집혔었다. 올림픽 최고 이벤트 남자 육상 100m에서 9초79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캐나다의 벤 존슨이 약물을 복용한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신기록은 삭제되고 금메달은 박탈됐다. 존슨은 그 후 재차 도핑테스트에 걸려 육상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말았다.

메이저리그에는 지금 약 냄새가 진동한다. 약물에 찌든 자들이 스타로 행세한다. 메이저리그가 너무 오랫동안 숫자 놀음, 돈 놀음에 취해 있었던 게 아닐까? 이제 그들이 약물로 조작해낸 기록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베이브 루스, 행크 아론을 비롯해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만들어온 숱한 별들의 자랑스러운 업적이 그들의 냄새나는 허수로 덮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분하고 서글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