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유럽 2006]
제 43탄. 바르셀로나 번외 - 유럽 속의 나홀로
- 작성일
- 09-04-21 14:28
그 동안, 혼자 다니는 여행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왔다. 다들 좋다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스위스는 포기한거나 다름없다시피 했었으며, 비엔나, 뮌헨, 나폴리 처럼 없는 일정을 마음 내키는대로 집어 넣었고, 짤즈부르크, 베르사유, 피렌체의 두오모처럼 당연히 갔어야 하는 곳을 내 마음대로 제외해 버렸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여행방식이지만, 함께 다니는 이가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혼자 다니는 것이 진정한 자유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행 중반을 넘기면서 부터, 마주치는 한국 배낭족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다. 라이니, 스코틀랜드니, 알자스로렌이니, 룩셈부르크처럼, 한국인을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기괴한 여행지만 골라서 찾아가던 일정은 끝나갈 무렵이니 여느 배낭족들처럼 한국사람끼리의 부대낌이 잦아지게 된다. 물론 좋은점도 있고 나쁜점도 있다. 우선 같은 나라 사람들간의 대화이다보니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외국인들보다는, 모든 점에서 훨씬 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정보를 나누는데도 아무런 장애가 없고, 무엇보다 바로 옆에 같은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가끔씩, 하얀종아리 처럼 도통 잊기가 힘든 인연을 만나면서 외로움을 느끼게 될 겨를이 없다. 하지만 조용히 공원 벤치에 앉아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나 자신을 끄집어 내어 하염없이 상념에 빠진다거나,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하며 엽서를 쓴다거나, 이리저리 구도를 바꾸어보며 같은 장소에서 수십장의 사진을 찍고 카메라 액정을 보며 어떻게 찍을까고 고민에 빠진다거나 하는 혼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재미는 포기해야만 한다. 발렌타인이나 닉 아저씨, 리 형님 같은 외국친구를 사귀게 될 일도 별로 없어진다. 뭐,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는다면 어느쪽이든 좋다. 혼자서 명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도, 외롭고 심심하면 "안녕하세요~!!"를 외쳐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 다시 여운 없는 작별을 나누면 된다. 그러고보니 요즘들어 나 같은 나홀로족들과 대화를 나눈적이 많다. 헌데 이야기를 할 때 마다 '이 새끼는 어쩌면 이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걸까.. 가까이 하지 말아야 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친구를,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잦은 비율로 만나게 된다. 환장할 노릇이다. 남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 이야기만 해 대고, 자기가 듣고 싶은 여행지 정보만 캐가려 하고, 자신의 동선과 여행철학이 최고인양 떠들고, 상대방의 실수를 못 견뎌하고, 그 전에 상대방을 배려조차 하지 않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서 "그 자식들이 지껄인 왕재수 어록" 같은것은 소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상대를 배려하고 싶으니까. 어딜가나 모난놈은 있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된게 여기는 모난돌이 좀 많다. '이 친구의 말과 행동은 왜 이정도 밖에 되지 않을까.. 왜 이렇게 사회성이 없을까.. 한국에서도 이런식이었다면,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당하기에나 딱 적당할텐데..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사회성이 있는데.. 나는.. 나는.. 나는..' 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섬ㅤㅉㅣㅅ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그렇게나 고깝게 보아온 일부 나홀로 배낭족들처럼, 잠시 마주친 동행인들에게, 나도, 무례했다. 자기이야기? 자기가 듣고싶어하는 정보? 자기만의 여행철학? 상대방에 대한 배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나를 향한 말들이었다. 생각할 수록 기가 막힌다. 오베르에서 만난 아가씨에게 내 일정을 자랑하기 바빴고, 상젤리제에서 함께 홍합을 먹은 누님들에게는 나홀로족의 서러움만 토로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었다. 피렌체에서 만난 형의 사진 이야기는, 내 어설픈 사진지식으로 깔아뭉게기 바빴었다. 비엔나의 발렌타인에게도 사실은 내 이야기, 한국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 없었고, 네델란드가 어떤 곳인지, 발렌타인이 뭐하는 친구인지에는 그닥 관심이 없었다. 맙소사, 나는, 나 자신이 그렇게도 욕하던 혼자 잘난 쓰레기배낭족이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이 내가 어쩌다 그런짓이나 하고 다니게 되었을까.. 혼자여서 그랬다. 혼자니까. 혼자 떠나는 자유여행은, 그렇다. 뭐든 내마음대로 하면 되니까. 남을 배려하려 해도, 애저녁에 배려해야 할 상대방이라는 존재가 없으니까.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그 짧은시간에 나 자신이 무서우리만치 빨리 적응해서,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태도를 잃은것이었다. 사회성을 흘린채 다니던 것이었다. 나도 그렇고, 그 친구들도 그렇고, 귀국해서 다시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하다 보면, 금방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겠거니. 여행이야 혼자 마음 내키는대로 즐길 수 있지만, 인생을 그런식으로 혼자서 자유롭게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친구끼리, 형제끼리, 연인끼리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앞으로 찾아갈 여행지 선택에서부터 그날 그날의 식사, 쇼핑, 숙소예약 같은 소소한 부분까지 아웅다웅하며 다투게 되면 조금씩 조금씩 악감정이 쌓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더운 날씨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그런 상태가 이어진다면 결국 감정이 폭발하여 싸우게 되고, 결국 여행을 망쳤다는 생각과 함께 "다음번엔 꼭 혼자 와야지."라고 굳게 굳게 다짐하는 경우도 꽤 보아왔다. 누군가를 알려면 그 사람과 여행을 떠나라는 말이 있다.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평소에는 가깝게만 느껴온 친구, 형제, 연인과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일들로 의견차이가 벌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서로가 자기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대의 다른점을 알아가며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어서, 결국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도, 그 또한 여행의 맛이 아닐까. 하얀종아리 생각에 밤새도록 잠을 뒤척이다 새벽비행기를 타고 세비야로 날아온 나는, 세비야역에 도착하여,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특급열차 AVE가 당도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역 구내의 전광판이 열차 도착을 알리더니 승객들이 하나 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 수백명의 사람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가려냈다. 희재. 논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의정부와 평택을 오가며 2년간의 군시절을 함께 보낸 소중한 내 동기. 전우. 하얀종아리를 결국 따라가지 못한 연유를 이제와서야 밝히자면, 인천공항에서 보딩패스를 끊기 훨씬 전부터 이미 이날, 이 시간에 이곳 세비야역에서 희재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까닭이었다. "야... 내가 너 만나려고 날려 먹은 기회비용이 얼마나 비싼지 아냐." 라는 앞 뒤 설명을 다 잘라먹은 과격한 인사와, "누구는.. 2년동안이나 본 놈을 이 먼데까지 와서 또 봐야돼?" 라는 대답과 함께 진한 포옹이 이어진다. 우리는 그런 사이였다. 그래. 그 동안 그 잘난 혼자만의 자유를 누비느라 사회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었다. 반갑다 친구야. 앞으로 열흘동안 함께 다니면서, 그 긴긴 2년동안을 부대끼면서도 몰라왔던 것들을 어디 한번 발견 해 보자.  희재 역시 역시 발렌타인처럼, 얼굴이 잘 생긴 친구는 아니다... 뭐.. 내게는 다행한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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