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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한 유럽 2006]

제 49탄. 마드리드 :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어요.

작성일
09-04-27 09:33
글쓴이
퍼스나콘 [눈웃음]선배거긴안돼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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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을 뜻하는 그랑비아GranVia는 호텔과 레스토랑, 극장, 카페와 상점들이 죄 몰려있는 역동적인 번화가다.

스페인이 유럽의 다른나라들보다 물가가 싼 편이라서 휴가철에는 스페인 이곳 저곳을 여행하다가,

가격도 비싸지 않으면서 물건의 종류도 많은 마드리드의 그랑비아에 마지막으로 들려

겸사겸사 쇼핑을 와장창 해가는 사람들이 많단다.



















쇼핑이라고 해서 빠리의 샹젤리에처럼 샤넬이니 구찌, 버버리, 루이비통 같은 명품매장만 즐비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 100만원에 팔리는 손가방을 60만원에 살 수 있다면 싸기야 하겠다만,

내가 어떻게 언감생심 쳐다 볼 만한 가격이 아니기는 매 한가지다.

마드리드에는 ZARA나 H&M, MANGO 같은 중저가 브랜드도 우리네 베이직하우스 마냥 지천으로 널려 있다.







관세와 마진이 얼마나 들러 붙는지는 몰라도 이 옷들이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가격대가 미친년 널뛰듯 뛰어 버리던데,

이곳 매장의 태그에 찍힌 가격을 확인하니 우리의 자랑스런 베이직하우스랑 진배 없다.

돈 아끼려고 에펠탑도 올라가지 않는 배낭족들이 마지막으로 쇼핑하는 기분을 내기에는 아주 적당하다.



















여러 매장들 중에서도, 나는 스페인 브랜드인 ZARA가 더 없이 마음에 들었다.

(스페인어의 ‘Z’는 쌍시옷 발음이기 때문에, 자라가 아니라 ‘싸라’라고 읽어야 한다)

떨어지지 않는 품질의 최신패션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는

저가브랜드이긴 하지만 도무지 싼티가 나지 않는다.

트랜드를 확실히 반영 하기 위해서 신제품을 매주 출시하고,

한번 출고된 제품은 인기와 관계없이 다시 출고되지 않는단다.

길에서 나랑 같은 옷 입은 녀석을 보면 기분이 나쁘니까.

그 놈의 옷이 뭐 대단한 거라고 스페인 전역의 싸라 매장을 지날 때 마다

나는 봄날 처녀마냥 가슴이 설레곤 했었다.









그랑비아의 샌드위치가게에서 희재는 주문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버벅이고 있다.

‘뻬르돈? 뻬르돈?’ 그냥 영어로 하지 내가 들어도 답답한 스페인어를 굳이 써 보겠다고

용을 쓰는 희재에게, 생긋 웃으며 몇번이고 천천히 다시 말해주는 점원을 보니

꼬르도바 레스토랑의 그 쳐죽여도 시원찮을 웨이터가 자꾸 떠오른다.





우리가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데다가 피부가 하ㅤㅇㅒㅆ더라면,

아무리 스페인어를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식이 희재에게 포크를 집어 던지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

희재도 그 때 데인 상처가 너무 커서 저렇게 일부러 스페인어랑 씨름을 하고 있는걸거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될까 봐서.









한길 속을 알 수 없는게 사람인데, ‘인종’이라는 자신만의 틀에 맞춰 감히 사람을 재단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도 참 불행한 사람이고, 그 사람을 만난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단히 불행히도 우리나라에도 간혹 있다.

물론, 사실상의 단일민족인 우리나라국민들끼리는 인종을 들고와서 사람을 차별할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인종문제가 없는 나라에서도 학벌이나 직업, 집안, 종교 같은 별 시덥잖은 일보다

훨씬 위에 있어야 할 ‘사람’ 도매금으로 넘겨지는일이 왕왕 생긴다.











나야 존경 받을만한 직업을 가진 부모님 아래에서 도통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컸고,

학벌이 중요한 이 땅에서 그럭저럭 쳐 주는 우리대학교 이름만 대면 차별이라는 것을 당할 일도 그다지 없긴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라도, 거지 같은 몰골로 어디 근사한 곳을 가게 된다면

꼬르도바에서와 비슷한 일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아부지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몸으로 표현하는 분이셨다.

어린시절부터 내 기억속의 아부지는 언제나 빛바랜 양복에 덥수룩한 머리의 '지식인'이었다.

아버지의 일상은 아들의 신화다.

어릴적 보던 만화에서도 진정한 실력자는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전혀 최고 같지도 않았으니까.

머털도사 매양 순 어디서 빌어먹던 구질구질한 녀석이 반쯤 감긴 눈으로

당대의 고수들을 쓰러뜨리는 모습이야 말로 남자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라 생각했었다.

실제로, 아들의 눈에는 누구보다 힘 세고 크고 똑똑한 사람이 바로 아부지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아부지처럼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멋이고 로망인줄 알았다.







하지만 ‘껍데기’에 불과한 피부색으로 무시 한번 당해보니 또 생각이 달라진다.

하다 못해 글씨를 써도 깨끗하고 예쁘게 써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는게 우리세상 아니던가.

사람이란 원래 겉모습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존재 맞다.

같은 능력과 같은 조건이라면, 아무래도 용모가 단정한쪽이 낫다.

우리가 김태희에게 괜히 열광하는게 아니다.

가식이라기 보다는, 남을 배려한 예의이고 매너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나무랄데 없는 인격과 지성에도 불구하고

10년 좀 넘은 잠바 속에 다 떨어진 런닝셔츠 입고 다니시는 우리 아부지가

나 없는 곳에서 차림새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경상도 부자지간은 원래 대화와는 친하지 않다.







다만, 허구헌날 엄마한테 ‘그런 꼴로 좀 다니지 마이소.’라고 제발 면도 좀 하라고 잔소리 듣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면전에서 ‘너거는 아빠처럼 저래 살지 말그래이.’하고 멸시 당하는 모습은 확실히 좀 안쓰럽다.

남성이란 원래 여자한테 인정 받으면서 자기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행복해하는 법인데 아무리 우리 부모님이라지만 결코 바람직한 풍경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난 착한 아들이니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어요!!" 하고

고함 버럭 지르고 울면서 마당을 뛰쳐나간적은 없었다.









유럽에는 멋쟁이 훈남들이 참 많다.

얼굴만 잘생긴게 아니고 다들 깔끔하고, 옷도 멋있게 잘 차려입고 다닌다.

머릿속에 든게 같다는 조건이면,

아무래도 아부지보다는 이 친구들처럼 폼 나게 사는 쪽이 더 나을 듯도 싶다….































































“얼씨구. 가자는 똘레도는 안 가고 하룻동안 안보이시더니,

그래 그런 장황한 이유로 집에다 돈 보내달래서, 옷을 한보따리씩이나 사 들고 오셨어?

참 불효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만.”





“뭐 임마. 보태준거 있냐? 아부지 선물로 와이셔츠랑, 넥타이도 하나씩 샀다고!!”









마드리드 근교의 똘레도로 가자던 희재를 버려두고 하루 종일 그랑비아의 다섯개나 되는

싸라 매장을 싸돌아다니며 옷을 잔뜩 사 온 그날 저녁,

희재는 나더러 기껏 키워 봤자 아버지 욕이나 하는 놈 운운하며 한심해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산더미 같은 옷들을 하나하나 꺼내다 민박집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눈 오는 날 개처럼 좋아라 한다.



“스페인에서는 싸라가 싸요. 다른 나라 가시기 전에 싸게싸게 사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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